[우리말과 한국문학] 문학이라는 마술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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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05   |  발행일 2019-12-05 제30면   |  수정 2020-09-08
양축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중국의 것이든 우리 것이든
비현실적인 허구 알면서도
현실 극복 치유요소로 개입
고단한 삶에 활력 불어넣어
[우리말과 한국문학] 문학이라는 마술
정우락 경북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

중국 저장성 닝보에 양축문화공원이 있다. 양산백과 축영대의 사랑을 소재로 해서 만든 공원이다. 공원 앞에는 남녀 두 사람이 나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거대한 석조상이 있다. 이밖에도 도처에 이들의 애정을 시사하는 누각이나 정자를 만들었고, 여기에는 나비는 물론이고 무지개와 같은 몽환적인 시설물들을 조형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산백묘, 양축독서원과 같은 건축물을 만들어 이들을 기리고 있다.

사실 양축 이야기의 진원지가 닝보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들의 것이라 주장하는 무덤이 닝보뿐만 아니라 허난의 주마점, 산둥의 지닝, 장쑤의 의흥에도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이 이야기가 서로 자기의 것이라며 다툰다. 이 가운데 가장 본격적으로 문화사업을 벌이는 곳이 바로 닝보다. 민간 전설에 바탕을 둔 양축 이야기의 영향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베트남, 미얀마, 일본,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으로 전파되어 자국화되어 갔고, 중국 내의 경우를 보더라도 30여 종의 희곡, 100여 곡의 가요, 10여종의 드라마와 영화가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이야기의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동진 시기 축영대가 남장을 하고 항저우에서 유학을 하였는데 거기서 양산백을 만난다. 둘은 3년 동안 함께 공부하며 깊은 우정을 나눈다. 축영대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양산백은 비로소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양산백은 축영대를 찾아가 청혼을 하였으나, 그녀는 이미 부모의 강요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양산백은 그만 우울증에 빠져 죽는다. 축영대가 시집가는 날 양산백의 무덤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축영대가 제를 올리자 갑자기 무덤이 갈라지고 축영대는 그 속으로 빨려든다. 얼마 후 무덤에서 한 쌍의 나비가 나와 하늘로 올라간다.

이 이야기의 한국 버전이 고소설 ‘양산백전’이다. 축영대도 양대로 바뀌었고, 후반부의 변개가 더욱 심하다. 즉 양산백과 양대의 혼이 저승의 선계로 올라가서 후생연분 맺기를 간청하자 옥황상제가 이를 허락한다. 이후 이들은 인간세계로 내려와 무덤 속에서 부활해서 성대한 혼례를 올린다. 마침, 북방의 오랑캐가 변방을 침범하여 나라에서는 급히 인재를 뽑기 위해 과거시험을 보인다. 여기에 응시한 양산백은 문무 양과에 장원급제한다. 전장에 나아간 양산백은 커다란 무공을 세워 북평후에 봉해진다. 양산백과 양대는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80세가 되어 함께 세상을 떠난다.

양축 이야기는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두 사람이 혼사장애에 부딪혀 초현실적인 ‘죽음과 재생’을 통해 애정을 성취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진실한 애정을 가로막는 봉건질서의 횡포를 고발하는 요소도 있다. 그런데, 중국과 한국의 현실 대응 방식이 조금 다르다. 중국은 장자의 호접몽 등에서 익숙하듯이 이들은 나비라는 몽환적 재생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실제 인간으로 부활시켜 부귀와 영화를 함께 누리다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게 한다. 현실적인 성취인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처럼 현실을 더욱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가 깊게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것이든 한국의 것이든 양축 이야기는 허구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거듭 자신의 이야기로 변개시킨다. 험난한 현실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처럼 논리로 따지지도 않고, 역사처럼 사실을 밝혀 후세에 귀감으로 삼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현실적 장치를 통해 이루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꿈’을 통해 현실을 극복한다. 즉 문학적 허구에는 치유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양산백과 축영대의 죽음과 재생은 나의 처절한 죽음과 빛나는 재생, 바로 그것이다. 이 때문에 문학이라는 허구는 우리의 고단한 삶을 치유하는 마술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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