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블로그] 한식 현대화<中>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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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9   |  발행일 2019-11-29 제41면   |  수정 2019-11-29
국내최고 ‘경북 4종 古조리서’ 메뉴 연구·보급…종부내림음식 관광자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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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요록’ 다음으로 오래된 고(古)조리서 ‘수운잡방’. 안동의 대표적 고조리서로 탁청정 김유가 남성 사대부로서는 이례적으로 121가지 음식을 소개해 놓았다. 이를 전수하기 위해 2013년 수운잡방연구회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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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이건 두 종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원형이란 이름의 전통을 지키는 길이고, 또 하나는 그걸 달라진 시대의 시각으로 새롭게 변형해주는 길이다. 그런데 한식의 원형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고(古)조리서가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식(전통음식)을 연구해야 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조리서를 연구해야 된다. 현재 국내에는 30여종의 고조리서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레시피를 장착해 재현해 먹을 수 있는 고조리서는 극히 드물다. 특히 경북은 고조리서의 메카이다. 대한민국 최고 고조리서 4종을 모두 갖고 있다. ‘수운잡방(需雲雜方)’ ‘음식디미방’ ‘온주법(蘊酒法)’ ‘시의전서’ 등이다.

경북여성정책개발원은 2010년부터 3년간 불천위음식을 창업으로 연결시키는 사업까지 펼쳤다. 현재는 불천위문화사회지원단까지 꾸려나가고 있다. 수운잡방의 안동, 음식디미방의 영양, 시의전서를 가진 상주, 그밖에 경주와 청송 등 명문 반가 종부 등을 연결한 종부내림음식에 대한 다양한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다. 이런 가치를 대중화하기 위해 경북도는 현재 경북종가음식체험관과 국립종가문화진흥원을 경북으로 유치하기 위해 물밑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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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마다 자기 고장 고유의 음식을 양식당 같은 한옥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다양한 한식체험관을 열고 있다. 2017~2019년 시의전서 명품화사업 덕분에 탄생한 상주 중동에 있는 시의전서 음식 전문점 ‘백강정’ 식탁에 오른 재현음식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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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예미정’이 지난 8월 독립군음식을 재현해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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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음식디미방 체험관에서 먹을 수 있는 대구껍질누르미. 누르미는 즙을 끼얹는 전통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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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예미정’이 개발한 안동비빔밥 도시락.

◆너무나 귀한 고(古)조리서

우리에겐 고조리서가 참 귀하다. 왜 그럴까. 그럴 수밖에 없는 논리적 구조가 있다. 음식은 귀하게 여기지만 조리사는 천대했다. 고조리서가 있더라도 상당수는 집필 연대, 저자, 서문과 해제가 전무했다. 또한 길이와 양을 눈대중과 손대중에 의존하다 보니 요즘 조리사들이 음식을 정확하게 재현하기가 무척 어렵다. 반가의 종부들도 요리만 할 줄 알았지 그걸 후대에 남기겠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대신 정밀하기 이를 데 없는 제상 진설법만 전승시켰다.

의학서적은 국왕 자신이나 국민의 치병과 양생을 위해 국가에서 직접 편찬하고 간행했다. 농서는 국가재정을 위해, 농경법의 개량과 보급을 위해 국가가 챙겼다. 하지만 요리법은 개인 또는 각 가정의 몫으로 돌려 공식 도서목록에도 올리지 않았다. 궁중요리는 진찬의궤 등을 통해 그 원형을 남겼다. 하지만 반가나 일반 민초의 음식문화에 대한 문헌은 전멸상태다.

중국은 우리와 달랐다. 시경(詩經)에서부터 생선, 회, 김치, 구이, 탕 등에 대해 터치를 했다. 6세기, 그러니까 우리의 삼국시대 때 북위의 가사협이 지은 방대한 조리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이 등장한다. 중국 산둥반도가 주무대인 이 책은 북송대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물론 조선조 요리문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준다. 작고한 식품사학자 이성우는 ‘제민요술에 등장하는 김치의 한 종류가 백제로 건너와 ‘수수보리지(須須保利漬)’란 이름으로 일본에 전해졌고 이것이 훗날 일본 다쿠앙으로 변형됐다’고 주장했다.


가장 오래된 요리 전문서 ‘산가요록’
술빚는 방법 63가지, 230 종류 레시피
영양 ‘음식디미방’ 상주 ‘시의전서’
경주·청송 명문 반가 다양한 콘텐츠

안동지역 양반가 전통음식 ‘수운잡방’
술·장류·김치·식초류 등 121품 조리법
발효전문가 주목 받는 포도주 빚는 법
15개 종가 내림음식 전수 현대화 박차
탈춤축제 안동비빔밥 도시락 개발도
만주 독립군 신흥무관학교 밥상 복원
호국시탕·기름개구리찜 전장음식 준비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고요리 전문서는 뭘까.

그동안 김유가 지은 수운잡방으로 알려졌는데 실은 1400년대 중반 ‘의방유취’를 지은 당시 의관 겸 식품학자였던 전순의가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이다. 여기에는 술 빚는 방법 63가지를 포함해 모두 230여 종류의 음식 레시피가 소개돼 있다. 김치의 경우 나박김치, 생강김치, 송이김치, 동아김치, 동치미, 토란김치 등 38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식품학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대목은 바로 온상재배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전순의는 “겨울철에도 채소를 먹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농 기법이 필요한데, 바로 겨울에도 채소가 자랄 수 있는 온실을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운잡방과 안동종가음식

‘수운잡방’은 안동지역 전통음식의 얼개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요리책이다. 300년간 문중 서고에 잠자고 있던 이 책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공개한 사람은 안동대 식품영양학과 윤숙경 명예교수. 당초 수운잡방은 광산김씨 예안파 저자 탁청정(濯淸亭) 김유(1481∼1552)의 셋째아들 설월당 김부륜의 15세 종손 김영탁씨가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6·25전쟁 때 문중의 가보가 멸실될 것을 염려해 마루 밑에 땅을 파 깊게 묻어뒀다. 1986년 10월 마침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서 안동지역 전적문화재 조사 때 동행한 저자의 방손인 김경태씨가 이 책을 윤 교수에게 처음 보여준 것이다. 후손들은 이 책이 한국 전통요리의 중요한 연구 자료라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윤 교수는 1998년 수운잡방에 대한 해석본을 신광출판사를 통해 출간했다.

수운잡방은 어떤 책인가. 일단 여성이 아니고 사대부가의 남성이 지은 조리서라는 점이 이채롭다. ‘수운’이란 단어는 역경(易經)의 한 구절에서 인용된다. ‘구름 위 하늘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게 하며, 잔치와 풍류로 군자를 대접한다’는 구절인데, 격조 있는 음식을 뜻한다. 제1~86항까지는 행서체로 1부, 그 뒤는 초서체로 2부를 장식했는데 윤숙경 교수는 1부가 김유의 작품으로 봤다.

전체 음식은 121품으로, 역시 양반가답게 음식보다 가양 전통주 빚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주류는 60품, 장류는 10여품, 김치는 15품, 식초류 6품, 채소 저장법 2품, 이밖에 15개 항목에 걸쳐 엿 만들기 등 기타 조리법이 소개돼 있다.

특히 경상도 반가에서 즐겼던 각종 장 요리법이 풍성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메주는 즙장(汁醬), 조장(造醬), 청근장(菁根醬), 기화장(其火醬), 수장법(水醬法) 등이다. 경북 북부의 이런 장법이 대구로 오면 등겨를 주재료로 만든 시금장으로 진화해 대구식 육개장을 먹을 때 반드시 곁반찬으로 따라 나왔다. 참고로 당시 메주는 ‘시’로 표기됐다.

또한 국내 발효전문가들이 비상한 관심을 갖고 보는 항목이 있다. 바로 포도주와 타락(駝駱)이다. 소믈리에들은 15세기에 한국형 와인의 시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전통 포도주 빚는 법에 관심을 갖는다.

‘멥쌀 3말을 여러 번 씻어 곱게 가루 내어 죽을 쑨다. 식으면 누룩 7되와 함께 독에 넣는다. 익으면 멥쌀 5말을 여러 번 씻어 통째로 찐다. 식으면 누룩 3되 포도가루 1말과 섞어 먼저의 밑술과 함께 독에 넣는다. 익으면 쓴다. 또 다른 법도 있다. 포도를 짓이겨 놓고 찹쌀 5되로 죽을 쑤고 식으면 녹말가루 3홉과 섞어 독에 넣고 맑아지면 쓴다.’

이는 유럽의 와이너리에서 장기 오크통 숙성한 정통 와인과 달리 꼭 ‘포도탁주’를 연상시킨다. 다른 고요리서에서는 유제품을 거의 볼 수 없는데 여기선 볼 수 있다. 타락은 소젖에 탁주 혹은 식초를 넣어 발효시킨 조선조의 요구르트 같은 거였다.

‘유방이 좋은 암소로 하여금 송아지에게 젖을 빨려 유즙이 나오기 시작하면 유방을 씻고 젖을 받는다. 우유가 끓어서 익게 되면 오지항아리에 담고 본 타락 작은 잔 한 잔을 섞어서 따뜻한 곳에 놓은 다음 두껍게 덮어둔다. 밤중에 나무 막대로 찔러보아 누런 물이 솟아오르면 그 그릇을 시원한 곳에 두어 엉기게 한다.’

순두부처럼 생긴 타락은 쉽게 말해 ‘우유로 가공해 만든 우유죽’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타락죽은 임금의 별식으로도 애용됐다.

김치의 경우 아직 고추가 들어오지 않은 때라서 요즘과 달리 붉은 기운이 전혀 없다. 그냥 말갛다. 재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부재료는 가능한 적게 넣고 있다. 그런데 재료가 요즘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이밖에 순무, 머위, 우거지, 토란줄기, 가지, 밀기울, 할미꽃, 산초, 꿩, 술지게미, 목이버섯기름, 겨자가루 등이 들어가 한결같이 맑은 기운이 돋아나고, 일견 장아찌, 피클 같다는 느낌이 든다. 현대 김치와 조선 김치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려준다.

그 이후 수운잡방은 다양한 형태로 연구된다. 2006년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윤숙자 소장이 전통음식 48가지, 전통주 42가지 등 121가지 음식 중 90가지 음식을 현대감각에 맞게 재현해 사진과 함께 실어 도서출판 질시루에서 출간했다. 대구 가톨릭대 식품영양학과 박금순 교수가 안동의 전통음식 중 개발 가능한 메뉴 개발을 연구, 은어와 숭어를 달인 국물에 삼색청포묵과 새우완자를 빚어 만든 삼색어아탕, 동물성단백질인 소고기와 식물성단백질인 콩을 이용해 만든 육면, 꿩 대신 닭고기와 오이를 주재료로 만든 김치, 기타 여러 가지 침채류 등 20점을 재현했다.

2013년 수운잡방음식연구원이 개원됐다. 전통음식 지도자 양성과 전통음식업소 및 고택체험 가정에 수운잡방 메뉴를 보급하여 관광 자원화에 앞장서고 있다.

안동음식 현대화에 가장 중점을 두는 곳은 안동농업기술센터 우리음식연구회,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조옥화, 그리고 종가음식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데 가장 성공을 한 ‘예미정(禮味亭·대표 조일호)’이다. 한국 첫 고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지은 정부인 안동장씨(장계향)의 친정집 경당종택을 비롯해 고성이씨, 의성김씨, 안동권씨, 영양남씨 등 모두 15개 종가로부터 내림음식 레시피를 전수하고 있다.

특히 김치는 안동김씨, 묵나물비빔밥은 안동권씨, 안동한우 관련 요리는 풍산류씨, 그리고 독자적으로 참기름·간장·된장·고추장까지 개발하고 있다. 이런 종가의 기본이 담겨진 안동종가밥상을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게 정상동에 전문식당까지 차렸다. 이에 앞서 2013년 종가음식체험관을 부설로 개설한 바 있다. 2017년 안동국제탈춤축제 때 박정남 안동종가음식교육원장이 축제음식으로 도시락 스타일의 안동비빔밥 도시락을 개발해 눈길을 끌었다. 안동비빔밥 도시락은 고사리, 도라지, 애호박 등 9가지 나물 무침과 깨소금을 함께 비벼 고슬고슬하고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안동 종가음식체험관은 지난 8월14일 만주 독립군 밥상 복원 시연회를 열었다. 시연회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이 먹던 꿩고기 옥수수 국수와 옥쌀밥, 버들치호박잎매운탕, 콩자반, 두부비지국, 차좁쌀 시루떡 등도 볼 수 있다. 이밖에 독립군들이 주둔지와 월동지에서 먹은 기장쌀 조당수, 산토끼고기 감자만두, 산돼지고기로 만든 호국시탕, 산더덕잣죽, 월동 산개구리로 만든 기름개구리찜, 밀전병, 메밀전병 등 야전 식재료로 만든 전장 음식도 준비된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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