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수도산 치유의 숲

  • 임성수
  • |
  • 입력 2019-11-29   |  발행일 2019-11-29 제36면   |  수정 2020-09-08
맑고 깊은 숲 가운데서 자연이 씻겨주는 마음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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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리 마을을 관통해 치유의 숲으로 가는 길 곳곳에 ‘인현왕후의 길’ 안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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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숲 힐링센터에는 세미나실, 프로그램 운영실, 장애인이 이용 가능한 화장실 등이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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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가로지르며 마음을 씻는 치유의 숲 힐링센터 내 세심정과 데크로드.

성주 대가천을 따라 달리는 30번 국도. 지침없이 맑은 물과 함께 긴 낮잠과 같은 크고 작은 돌들, 아직 갈색과 오렌지 빛깔의 더미로 풍성한 산, 그리고 자유롭게 조각 진 밭들과 매 계절 다른 수확물들을 보여 주는 들을 감탄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는 길이다. 수확이 끝난 차가운 땅에는 무청 따위가 넘치게 담긴 커다란 자루들이 우뚝 서 있다. 땅은 돌연 김천으로 바뀌지만 그러한 풍경은 변함이 없다. 청암사 이정표를 곁눈으로 보내고 수도암 쪽으로 향한다. 옥동천이 흘러 열어놓은 수도산의 북쪽 골짜기를 오르며 수도암의 확 트인 전경과 청암사의 단아함을 잠깐 떠올렸다. 점점 좁아지고 점점 높아지는 골짜기는 이따금 만월담, 와룡암, 용추폭포와 같은 이름으로 마음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폐서인 인현왕후가 3년간 머문 청암사
수도산 곳곳에 詩文‘인현왕후의 길’
숲 입구, 편의시설 갖춰진 힐링센터
널찍한 바위로 만들어진 숲속 교실
낙엽 데크길 가운데 세심정·세심지
솟구친 하얀 나무 군락 자작나무 숲


◆수도리, 인현왕후의 길, 모티길

수도산의 높이는 1천317m, 그 해발 800m 즈음에 수도리 마을이 있다. 산간 오지지만 마을 들입에 버스정류장도 있고 너른 주차장도 있다. 여기서부터 걸어 오른다. 마을 당숲을 지난다. 단을 높여 조성한 자그마한 당숲에는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와 조산무더기가 있고 한가운데에는 윗가지가 부러지고 속이 텅 빈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당나무의 위용을 보였을 나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나 여전히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늙은 신으로 보인다. 담벼락에 쌓인 배추들과 연기가 나지 않는 연통과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제 할 일을 하는 몇몇 사람들을 지나 마을을 관통한다.

길가에 ‘인현왕후의 길’이라는 안내판이 여럿이다. 청암사는 인현왕후가 장희빈과 남인들에 의해 폐서인이 된 후 3년간 머물었던 곳이다. 그녀는 수도산 곳곳을 다니며 시문을 짓는 것으로 한 많은 시절을 달랬다고 한다. 훗날 궁궐로 돌아간 인현왕후는 ‘큰스님 기도 덕분에 복위되었다’란 내용의 서찰을 보내 고마움을 표했다. 이러한 인연에 착안해 만든 것이 ‘인현왕후의 길’이다. 수도리 마을과 저 아래 용추 폭포, 수도계곡 옛길을 둥글게 이은 길로 5.8㎞ 정도 된다. 정작 청암사는 그 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청암사는 수도 도량이라 배려한 것이다. 오래전 청암사를 방문했을 때 카메라 셔터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마을을 지나 수도암으로 가는 아스팔트 오르막을 조금 오른다. 길 가에 선 인현왕후가 말한다. ‘새도 나의 벗이고, 산과 꽃들도 나의 벗이니 외롭지 않구나’ ‘수려한 산천을 보니 화폭에 담아 그리운 전하께 전하고 싶구나’. 곧 삼거리에 닿는다. 오른쪽은 ‘인현왕후의 길’과 수도암으로 가는 길, 왼쪽은 ‘수도녹색 숲 모티길’과 치유의 숲으로 가는 길이다. ‘모티’는 ‘모퉁이’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로 수도산 모티길은 해발 1천m의 임도 숲길을 걷는 김천의 대표적 트레킹 코스다. 서두가 길지만 그래서 더 두근두근 한다. 이제 ‘치유의 숲’이다.

◆수도산 치유의 숲

물기 있는 산길, 높은 하늘에는 구름이 짙어 두근거리던 마음이 금세 내려 앉는다. 숲 입구에 힐링센터가 있다. 건물에는 관리실, 세미나실, 프로그램 운영실과 장애인이 이용 가능한 화장실 등이 갖춰져 있다. 힐링센터에서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버리자 숲은 매우 조용해졌다. 센터 옆 인공적으로 만든 듯한 돌무더기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만이 약하게 들린다.

힐링센터 뒤쪽으로 난 산길을 오른다. 널찍한 바위들로 만들어 놓은 숲속 교실을 지나고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습지원을 지나자 하늘로 쭉쭉 뻗은 낙엽송 군락을 가로지르는 데크 로드가 보인다. 부끄럽게도 저 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나무들은 황금빛 이파리를 매달고 있고 데크 길 위는 나무로부터 떨어져 내린 잎들이 물기에 젖은 채로 가득했다. 바늘처럼 뾰족한 잎들이 무수히 겹쳐져 데크 길은 낙엽 길이었다. 그 길의 가운데에 세심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세심지가 있다. 마음을 씻는 곳. 인적 없는 자연 속에서 가벼운 불안을 씻어주는 것은 이러한 인공물들이다.

데크 길 끝에 자작나무 숲이 열린다. 가벼운 연기처럼, 투명한 공기처럼 솟구친 하얀 나무들의 숲. 하얀 몸에 새겨진 검은 옹이들이 수 천 개의 눈이 되어 일시에 나를 바라본다. 맑고 깊다. 숲은 가을과 겨울 그 중간쯤에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서 이미 너무 이르게 와 있는 마음의 겨울을 깨달았다. 자작나무의 옹이들은 높이 자라기 위해 스스로 잔가지를 떨궈낸 흉터라 한다. 맑고 깊은, 상처다. 바람은 아리고, 이 숲에서 약간 상처받는 느낌이 들었고, 이제 맑고 깊어지기를 소원했다. 아주 잠깐 하늘이 하나의 맑은 눈동자처럼 열렸고, 여리지만 선명한 빛이 쏟아져 내려 나무 한그루 한그루에 뚜렷한 새로움을 주었다.

‘치유의 숲’은 전국에 여러 곳 있다. 산림청에서 기존의 우수한 산림자원을 활용해 조성한 산림치유공간으로 아이부터 노인까지 큰 무리 없이 거닐 수 있도록 만든 숲길이다. 수도산은 지난 6월 산림청에서 발표한 ‘국유림 명품 숲’ 5개소 중에 하나다. 수도산 치유의 숲은 2018년 12월에 개방했으며 시와 음악이 있는 길, 잣나무 숲길, 자생식물원, 숲속 명상소, 숲속의 집 등이 조성되어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시 달서구 성서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성주를 지나 김천으로 들어가는 길을 추천한다. 수도암 이정표를 따라 수도산으로 들어가면 된다. 주차는 수도리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치유의 숲 힐링센터 옆에는 장애인 주차장이 소규모로 마련되어 있다. 인현왕후 길은 원점회귀 길로 수도리 주차장이나 용추폭포 주차장에서 출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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