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혐오와 권력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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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9   |  발행일 2019-11-19 제30면   |  수정 2020-09-08
힘의 바탕위에 생겨난 혐오
권력자는 대결 구도로 둔갑
사회 병폐 오명까지 덤터기
의식화가 활발한 곳이 학교
결국 답은 교육에서 찾아야
20191119
강선우 전 대통령직속자문기구 국가교육회의 전문위원

아래는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요즘 어떤 욕을 사용하냐’는 질문에 학생들이 답한 ‘욕’들이다.

“느금마 내가 사랑해요” “느금마 김치찌개 장인” “응 니 며느리” “SLD나 챙겨라” “너 오늘 그날이냐”

여기서 ‘느금마’는 ‘너희 엄마’를 뜻한다. “응 니 며느리”는 “응 니 애미” 대신 쓰는 표현이고, ‘SLD’는 생리대를 뜻하는 은어라고 한다.

그런데 중학생들이 ‘요즘 사용하는 욕’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느금마’ ‘며느리’ ‘SLD’ ‘그날’ 등 바로 ‘여성’이다.

언뜻 듣기에 칭찬 같지만 대화 상대의 어머님을 욕하는‘패드립’(패륜과 애드립의 합성어로 패륜적 발언을 뜻함)이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혐오’는 단순히 ‘싫다’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인종, 성별, 가난, 소수자, 비주류에 대한 ‘혐오’의 역사·문화·경제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동등하지 않은 위치’와 함께 ‘힘’ ‘권력’이 존재해 왔다. 그리고 그 동등하지 않은 위치와 권력의 바탕 위에서 생겨난 혐오는 촘촘한 차별과 단단한 불공정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준다.

‘혐오’를 ‘위치’ ‘힘’과 함께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혐오를 홀로 존재하는 사회 현상으로 보기 시작할 때, ‘힘을 가진 위치에 있는 자’들은 의도성을 가지고, 이 혐오를 ‘대결’이나 ‘싸움’의 구도로 둔갑시켜 유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이 아닌 ‘흑인과 백인의 대결’,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와 혐오가 아닌 ‘가진 자의 것을 뺏기 위한 투쟁’의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이 ‘대결과 싸움’은 결국 사회적 매몰 비용이 지불돼야 하는 ‘불필요한 소모전’이란 누명이 높은 사람과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 씌워지고, 없어져야 할 사회적 병폐라는 오명까지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착시현상으로 사회가 뒷걸음질 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혐오를 ‘동등하지 않은 위치’ ‘권력’과 함께 연결시켜 의식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회현상에 대한 의식화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물리적 공간 중 한 곳이 ‘학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청소년기와 성인모색기 동안 교사의 영향력과 친구들로부터 받는 또래압력은 인간의 ‘의식화’ 과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친다.

법원은 최근 “시집가려고 공부하는 것 아니냐” “(결혼 안 한다고 한 이유가) 문란한 남자생활을 즐기려는 것 아니냐” “여대는 사라져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죽은 딸 팔아 출세했네” 등의 혐오 표현을 자신의 강의 및 SNS를 통해 드러냈던 모 여대 교수의 해임처분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국 답은 ‘교육’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차이를 존중으로 극복하고, 무의식적인 차별에 눈 뜨며, 공감하는 토론을 학창 시절부터 배우려면, 교사에 대한 교육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개별교사들이 교사가 된 이후에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범대학 및 교대에서부터 인권, 감수성, 차별에 대한 ‘교사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이 교육이 학교 현장에서 뿌리 내리고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관련 교육이 정규 교과로도 편성돼야 할 것이다.

10여년 전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1년간 쓰기수업 학부모 봉사를 한 적이 있다. 하루는 어떤 아이가 “정말 싫어! (I hate it!)”라고 소리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이 “다른 표현으로 다시 말해 볼 수 있겠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정말 싫어! (I don’t like it!)”라고 고쳐 말했다. 혐오하는(hate) 것과 싫어하는(don’t like, dislike) 것의 차이는 분명하다.강선우 전 대통령직속자문기구 국가교육회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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