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하천변에서 수백 년 잊혀졌던 갈암 이현일 선생 건립 계정(谿亭) 석각 발견

  • 배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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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8 13:07  |  수정 2019-11-18 13:07  |  발행일 2019-11-18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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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영남학파 거두 이현일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계정(谿亭)'의 석각이 최근 영양 수비면 신원리 하천변에서 확인됐다. <영양군 제공>  

[영양]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어 조선 중기 영남학파 거두가 된 갈암(葛庵) 이현일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계정(谿亭)'의 석각(石刻)이 발견돼 복원사업에 활기를 띨 전망이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에 따르면 이영재 학예연구사가 지난 12일 영양 수비면 신원리 하천변에서 계정의 석각을 확인했다. 석각이 새겨진 바위는 수산유거지에서 동쪽으로 약 950곒 떨어져 있다.
 

지난 5월부터 영양군 문화시설사업소에서 추진하고 있는 수산유거지 복원사업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이 연구사는 "복원사업 용역을 추진하고 있는 안동대 산학협력단장인 배영동 교수로부터 현지인이 바위에 석(石) 또는 석계(石溪)라는 석각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룖며 "현지인과 동행해 확인해 본 결과 석각은 갈암 선생의 정자가 있었던 계정이었다룖고 발견 당시의 정황을 이야기했다. 
 

갈암은 영산서원(英山書院) 원장을 역임한 석계(石溪) 이시명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여중군자 장계향의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이다. 갈암은 20대 중반이던 1653년 부모가 낙토(樂土)를 찾아서 보다 깊은 산속으로 은거를 선택하자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양 수비면 신원리로 이주해 '수산유허비(首山遺墟碑)' 부근에 갈암(葛庵)이라는 집을 짓고 19년 동안 거주했다.
 

갈암이 지은 계정기(谿亭記)에 따르면 어느날 아버지를 모시고 동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신원천(新院川)변을 걷다가 기이한 바위와 맑은 물소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발견해 그곳에 계정(谿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바위에 두 글자를 석각했다. 기문과 문집에 의하면 갈암을 비롯해 석계 일가는 계정에서 밤낮으로 학문을 닦으며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선비의 이상적인 삶이었던 요산요수의 삶을 현실에서 구현한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계정에서 학문을 닦은 석계의 아들들이 모두 당대에 학문으로 일가를 이뤘으며 갈암의 경우 조정에 출사해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름에 따라 1672년 석계 일가가 수비를 떠난 뒤에도 그들의 유거지와 정자는 당대 유학자 사이에서 방문하고 싶은 명소가 됐다.
 

하지만 1694년 폐비 민씨 복위운동으로 시작된 갑술환국으로 인해 남인계가 몰락하자 갈암 또한 탄핵돼 유배를 가기에 이르렀고, 계정 역시 19세기 중반까지 세간의 뇌리에서 사라진 장소가 됐다. 갈암은 1909년에 가서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됐다. 1865년 후손과 후학들이 수산유허비를 건립함으로써 석계 일가가 살았던 유거지는 고증됐으나 갈암이 형제들과 학문을 닦고 소요했던 계정은 장소가 불분명했다. 1931년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 이곳을 지나간 수산(秀山) 김병종 역시 '세대가 오래돼 초당과 계정의 위치를 알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수백 년간 잊혀졌던 갈암 선생의 정자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지역사의 발굴과 유거지 복원사업에 있어서 모두 대단히 중요한 성과다. 이를 바탕으로 보다 실증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가 설정된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배운철기자 baeuc@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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