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대구 작가 현진건과 고향의 얼굴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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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4   |  발행일 2019-11-14 제30면   |  수정 2020-09-08
작가 현진건 1900년 대구출생
작품‘희생화’에 진한 사투리
지역성 잘 드러낸 소설 ‘고향’
일제에 터전 잃고 쫓겨 가는
대구 인근의 농민 슬픔 담아
[우리말과 한국문학] 대구 작가 현진건과 고향의 얼굴
김주현 경북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

현진건은 과연 대구(또는 경상도) 작가인가? 이상화를 대구 시인으로 간주하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고택이 보존되어 있고, 시비들이 시가지에 즐비하다. 그런데 대구 어디에도 현진건 관련 표지석 하나 찾을 수 없다. 작년과 올해 대구문인협회에서는 현진건 학술세미나를 연이어 개최했다. 이는 대구에서 현진건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현진건은 과연 대구 작가인가? 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대구에서 출생했을 뿐 그의 문학 세계는 대구와는 무관하지 않은가 하는 반문이 들어 있다.

현진건은 1900년 음력 8월9일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1913년 상경하여 공부하였으며, 1915년 대구에서 이순득과 결혼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17년 귀국하여 대구에서 이상화, 백기만, 이상백과 함께 동인작문집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현재 실물은 없지만, 이는 대구 지역 근대 문학을 싹틔운 첫 동인지로서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는 이상화와 더불어 근대 대구문학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후 현진건은 1920년 11월 ‘희생화’로 중앙 문단에 진출하였다.

‘희생화’는 청춘 남녀의 사랑을 다룬 것인데,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하지만 남자 집안의 반대로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K는 대구 사람으로 사투리와 표준어를 동시에 구사한다. “내가 어지도 올라카고, 아레도 올라켓지마는 올라칼 때마다 동무가 차자와서 올 수가 잇서야지”(‘개벽’ 1920.11)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대구(경상도) 사투리가 전면화된다. ‘어지’(어제), ‘아레’(그저께), ‘올라카고’(오려 하고), ‘올라칼’(오려 할) 등 구어(사투리)를 통한 근대적 언문일치가 실현된다. 현진건의 ‘희생화’를 기화로 대구 사투리가 근대 소설 속에 장엄하게 아로새겨진 것이다.

문득 나에게로 향하며 “어대꺼정 가는기요?”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부친다. “서울까지 가오.” “그런기요. 참 반갑구마. 나도 서울꺼정 가는데 그러면 우리 동행이 되겟구마.”(‘고향’ 1926.3)

현진건의 작품 가운데 지역성을 잘 드러내는 또 다른 작품으로 ‘고향’이 있다. 이는 그의 첫 단편집 ‘조선의 얼골’(1926.3)에 실렸는데, 위 광경은 열차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전형적인 사투리를 구사한다. 그의 가족은 대구 인근에서 역둔토 농사로 살아왔다. 그런데 역둔토가 동양척식회사 소유가 됨에 따라 생활이 어렵게 되자 서간도로 쫓겨 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빈주먹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얼마 못 가 아버지는 병으로, 어머니는 영양부족과 심한 노동 탓에 사망한다. 이후 그는 신의주, 안동현에서 품을 팔고, 규슈 탄광, 오사카 철공장 등지를 떠돌며 일했지만, 돈도 모으지 못하고 고향으로 갔다.

그런데 10년 만에 찾은 그의 고향은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는” 황폐한 곳이 되어 버렸다. 그곳에서 그는 과거 자신과 혼인 말이 있었던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열일곱살에 유곽에 팔려 갔다가 “20원 몸값을 10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주인에게 빚이 60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어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놓여났다. 그녀 역시 “10년 동안이나 그리던 고향에 찾아오니까 거기에는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쓸쓸한 돌무더기만 눈물을 자아낼 뿐”인 상황이었다.

현진건은 작품 말미에서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라고 하여 황폐화된 고향 현실을 ‘아리랑’ 가락에 담아 읊조렸다. 그는 일제의 침략으로 땅을 잃고 쫓겨 가는 대구 인근 농민들의 비참한 모습에서 조선의 현실을 보았다. 그래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리 방황하는 지역민의 슬픔을 식민지 조선의 얼굴로 부각하여 ‘고향’에 담아냈던 것이다.
김주현 경북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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