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디 서 있는가’…유작으로 남긴 메시지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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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1   |  발행일 2019-11-11 제22면   |  수정 2019-11-11
우손갤러리 내달 21일까지 이정민 전시
작가 갑작스러운 사망에 유작전 변경
그림에 담긴 포근함·밝은 에너지 눈길
‘당신은 지금 어디 서 있는가’…유작으로 남긴 메시지
이정민 ‘무-등-등’

배포된 보도자료의 전시 일정은 9월21일부터였다. 하지만 정작 전시가 시작된 것은 한달 여 뒤인 10월31일. 고치지 않은 전시 일정이 눈에 거슬린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손 갤러리가 12월21일까지 기획전으로 열고 있는 ‘이정민 개인전’은 작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뜻하지 않게 첫 유작전이 되어버린 비운의 전시다. 갤러리도 유족도 ‘오직 작품’만 이야기하고 싶어하나, 세상의 얄팍한 관심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작가 이정민은 옥인콜렉티브로 활발한 활동을 해 온 인물이다. 옥인콜렉티브는 1971년 인왕산 자락에 들어선 옥인아파트가 철거 위기에 처했던 2009년, 그곳 주민이던 김화용 작가와 이정민·진시우 부부를 주축으로 꾸린 작가 그룹이다. 버려진 공간과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인 주민들의 삶을 연대하는 도시재개발을 비롯해 부당해고, 위험사회 등의 주제를 라디오방송, 영상, 퍼포먼스 등으로 풀어왔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시립미술관(SeMA), 백남준아트센터 등 국내 유수 미술기관과의 협업, 광주비엔날레 출품 등으로 주목받았고 2018년 1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내부 문제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됐으며 지난 8월엔 이들 부부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미술계가 충격에 빠졌다.

이번 전시는 그의 네번째 전시이자 대구에서 열리는 첫 전시다. 이씨의 4년 만의 개인전으로 대부분 1~2년 사이 작업한 신작이다. 그룹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탓에 개인적 작품 활동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끈다. 이번 전시작들은 내년 3월 홍콩 아트바젤에 출품될 예정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이씨는 작가그룹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회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씨의 회화만을 모아 선보인다. 40여점의 스케치와 더불어 이씨의 회화 작품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이전 10여년 동안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된다. 그의 대표작 ‘산책- 형태’ 연작은 길을 걷거나 시장을 도는 일상에서 발견한 삶의 갖가지 형태를 절제된 필선을 이용해 추상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구체적인 대상물을 유추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형태의 것들이 겹쳐지고 쌓인 모습은 언뜻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것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함께 하나의 완벽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어떤 불평등도 없는 ‘무-등-등’의 세계다.

그에게 ‘산책’이란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천천히 산책을 하며 나를 둘러싼 사회 구조와 내 이웃의 모습을 살핀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어디인가. 그러므로 작가는 ‘산책하라’며 부추긴다. 내가 어디 서 있는지 알아야 내가 가야 할 길도 판단할 수 있는 법. 그의 모든 작업이 주는 일관된 메시지이자 작업의 이유기도 하다. 메시지는 묵직하나 그림은 밝고 포근하다. 감각적이며 힘있는 필선에서 넘쳐나는 에너지도 놀랍다.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타인에게 다가가는 법을 작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증명했던 이정민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이렇게 또 이어가고 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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