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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덕 장사리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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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뉴스부기자
  •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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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리 모래 구덩이서 총·포탄 피해 항전한 잊혀진 영웅들…

장사 해안의 문산호. 재현된 것이며 전시관으로 개관될 예정이다. 1950년 9월 좌초된 실제 문산호는 아직도 바다 속에 있다.
장사상륙작전의 학도병들을 재현한 동상과 위령탑.
장사해안의 소나무 숲에는 학도병들을 기리기 위한 공동 무덤이 있다.
장사상륙작전 참전 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메모리얼 벽화.
영덕 7번국도 변의 백일홍은 아직 붉은 꽃을 붙잡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이었기에 꽃들은 매우 강인해 보였다. 그러나 해변은 그렇지 못했다. 장사리 해안에 들어섰을 때 처음 보이는 것은 파도에 밀려 쌓인 갖가지 종류의 난파물들이었다. 해안은 속수무책으로 그것들에 뒤덮여 있었다. 이미 수습을 위한 작업이 한차례 이뤄졌던 모양으로 절반 이상이 거대한 마대자루에 담겨 듬성듬성 서 있었지만 해변의 서글픈 어수선함은 아직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장사해수욕장의 그러한 처참한 모습으로부터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변은 그리 길지 않지만 소나무 숲 앞으로 해안 광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거기에는 무척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조용하고, 조용했다.

50년 9월 유격대원 772명 태운 문산호
대부분 군번도 없는 학도병 출신 탑승
태풍에 좌초된 배…일부 대원도 수장
파도 뚫고 상륙, 북한군 퇴각로 차단
희생당한 대원 추모 전승기념공원 조성
공동무덤·추모탑·광장·메모리얼 벽화


◆장사 해안의 문산호

그 해안의 남쪽 끝 바다에는 커다란 배 한척이 떠있다. 모래사장으로부터 배의 선두로 나아가는 교각이 없었다면 그 또한 난파된 것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사실은 맞다. 그 또한 난파된 것이다. 1950년 9월에. 배의 이름은 문산호, 한국전쟁 당시 차출되었던 민간선박 문산호는 1997년 3월6일에 난파선으로 발견됐다. 배에는 부식된 유골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13일 오후 2시 부산항을 출발한 문산호에는 유격대원 772명과 지원요원 56명 등이 탑승해 있었다. 부대 이름은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대대장은 이명흠이다. 이들의 임무는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북한군의 눈을 동해로 돌리고,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여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바로 ‘작전명 174, 장사상륙작전’이다. 유격대원 772명은 이 작전을 위해 8월24일 대원모집에 지원한 이들로, 대부분 10대 소년들이었다. 경상도 지역에 거주했던 초등학교 고학년생, 중학생, 피란민, 전쟁고아들이었던 것이다. 훈련받은 기간은 20여일, 출항 때 보급된 식량은 건빵 한 봉지와 미숫가루 세 봉지였다.

문산호는 14일 오전 4시30분경 장사해안에 도착했다. 그날 해안은 마리아나해협에서 일본 쪽으로 진행하고 있던 태풍 케지아가 높은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문산호는 파도에 떠밀려 상륙지점에 도착하기 전 좌초되고 말았고 학도병 일부는 그 자리에서 수장되었다. 어둠 속에서 높은 파도를 뚫고 해안으로 상륙하는 유격대원들에게는 포탄과 총탄이 날아왔다. 그들은 장사해안의 모래 구덩이에 몸을 묻고 육지 어딘가로부터 쏟아져 날아오는 총알과 포탄을 피해 항전했다.

당초 작전 계획은 3일이었다. 보급식량이 적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조차 배가 난파되면서 먹을 수 없게 되었고 이후 학도병들은 해안 밭에서 캔 고구마와 감자로 허기를 달래며 전투를 계속했다. 무전기는 상륙과정에서 총탄에 맞아 파손됐고, 무전병은 이미 전사한 상태였다. 문산호의 대원들은 6일간이나 식량보급도 없는 상황에서 북한군의 보급로 및 퇴각로를 차단하는 등 혈전을 치렀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다. 문산호가 보이는 장사 해안에 당시 학도병들의 모습을 재현한 동상이 있다. 이제 막 상륙한 대원들이 적과 싸우는 모습이다. “아빠, 국군 아저씨들이 나라를 지키는 거지?” “맞아. 나라를 위해 싸우는 거야.”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상황을 한 눈에 알아본다. 놀랍다. 유모차에 누운 갓난쟁이는 더 없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9월19일 살아남은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수송선 조치원호가 장사해안에 도착했다. 탈출을 시도하던 많은 학도병들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희생당했고 적의 포탄이 함선에 집중되자 조치원호는 밧줄을 끊고 회항했다. 60여명의 학도병이 승선하지 못한 채였다. ‘작전명 174, 장사상륙작전’은 139명 사망, 92명 부상, 행방불명 다수라는 집계를 남긴 채 마무리됐다. “어, 이거 군번이네.” 학도병들의 동상 바닥에 ‘036’으로 시작되는 수많은 숫자들이 새겨져 있다. 학도병들에게 군번이 내려진 것은 작전이 끝난 뒤인 10월5일이다. 장사리의 유격대원들은 군번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던 것이다. 장사상륙작전은 원래 미8군 특공대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임무는 한국군에게 넘겨졌고 수행한 이는 군번 없는 학도병이었다. 배는 바다 속에 묻혔고 장사상륙작전은 비사로 묻혔다.

그러나 참전용사였던 에반호우의 기록으로 인해 장사상륙작전은 세상에 드러났다. 거기에는 작전상 지도, 문산호가 손상된 지점 등 세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로써 군사 전문가들은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양동 작전이며 한국전쟁의 중요한 수행 작전임을 인정했다. 에반호우의 한국전쟁 기록은 1995년 ‘다크문(Dark Moon)’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또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60년 10월31일, ‘772 유격동지회’ 이종훈 회장에게 보낸 편지도 전해진다. 거기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다’고 적혀있다.

772 유격동지회는 1980년부터 매년 9월14일 이곳 장사해안에서 봉분도 비석도 없이 묻혀 있던 전우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들은 위령탑 건립을 위해 국방부와 육군을 찾아다니며 여러 번 청원을 했지만 ‘200명 이상 전사한 전투만 국가에서 위령비를 세워준다’며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후원과 특히 양평 청운사의 석일산 주지스님의 도움을 받아 1991년 9월14일 위령탑을 건립했다. 그리고 1997년 장사리 바다 속에서 문산호를 확인했다.

지금 장사리 해안에는 전승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학도병들을 기리기 위한 공동 무덤, 추모탑과 추모광장, 상륙작전 재현 동상, 학도병들의 이름을 새긴 메모리얼 벽화 등이 들어서 있다. 바다에 떠 있는 문산호는 재현된 것으로, 전시관으로 사용될 계획이며 올해말에 임시로 개관할 예정이다. 1950년 9월의 문산호는 지금도 장사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포항고속도로 포항IC로 나가 7번 국도를 타고 영덕·울진 방향으로 간다. 영덕 지경 지나 조금 북향하면 곧 장사리다. 장사해수욕장 펜션 지구 남쪽에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문산호호국전시관은 올해 12월 임시개관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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