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시선]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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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7   |  발행일 2019-10-17 제30면   |  수정 2020-09-08
삼국사기 열전 설씨녀 얘기
보통사람들의 비참한 현실
특별한 사람보다 드라마틱
우리시대도 과거와 엇비슷
보통사람 얘기로 눈돌려야
[목요시선]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이정미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인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단순한 재밋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는 선악을 구분하는 도덕관념을 형성하고 다양한 인간 유형과 세상사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닦는다.

이처럼 이야기를 좋아하기에 반만년 역사 속에서 한국인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중 하나가 ‘삼국사기’에 실린 설씨녀 이야기다. 주인공은 신라 진평왕 때 경주에 살던 설씨 노인의 딸이다. 그녀는 단아하고 담백한 기품이 서려있던 미인이었다. 마을 청년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흠모했지만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아버지가 갑자기 군인으로 징집된다.

진평왕 시대는 고구려 을지문덕, 백제 무왕, 아직은 청년 장군이었던 신라 김유신 같은 전쟁 영웅들이 활약하던 시대였다. 그만큼 삼국 간의 항쟁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난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늙은 아버지를 떠나 보내게 된 설씨녀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런데 마을 청년 가실이 설씨녀와 아버지 앞에 나타났다. 설씨녀에게 청혼하며 대신 군인으로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두 사람은 징병 기한인 3년이 지나 가실이 돌아오면 혼인하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약혼의 정표로 청동 거울을 반쪽으로 쪼개 나눠 가졌다. 3년이 지났다. 가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실이 죽었다며 다른 사람과의 혼인을 종용했다.

설씨녀는 거부했고 다시 3년이 지났다. 그러자 아버지는 강제 혼인을 추진했다. 그녀가 비통한 마음으로 흐느낄 때, 피폐한 몰골의 한 사내가 나타나서 품속에서 청동거울 반쪽을 꺼냈다. 가실이 6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혼인했고 백년해로 했다. ‘삼국사기’ 열전의 이야기 중, 보통 사람이 주인공이며 왕과 귀족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 것은 설씨녀 이야기가 거의 유일하다. 아마도 김부식은 유교 사상에 입각해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이 이야기를 수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전혀 다른 현실과 의미를 발견한다.

왕과 귀족들이 일으킨 전쟁에 워낙 많은 젊은이들이 동원되어 무남독녀를 둔 노인마저 징병되어야 했고, 그를 대신해 군인이 된 청년은 약속된 3년을 다 채우고도 제대하지 못하고 3년을 더 붙잡혀 있다가 폐인이 되어 돌아와야 했던 현실, 이처럼 비참한 시대를 온 몸으로 견뎌내며 인간다운 삶을 지켜낸 보통사람들의 슬프지만 강인했던 생명력, 평범하지만 가장 위대한 이 이야기는 정절이란 편협한 사상 덕분에 영웅들의 이야기에 밀려 사장되지 않고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우리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수다한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 과거의 왕과 귀족을 대신한 유명 정치인과 스타 연예인이다. 우리는 그들의 영웅담과 미담에 매료되어 지지자 혹은 팬이 되고, 그들의 삶이 우리 자신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난해 12월 어느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산재 사고나 5년 전 바닷가의 대형참사처럼 통절한 비극이 발생했을 때만 잠시 명멸할 뿐이다.

이야기의 편중은 정책적 의제의 왜곡을 낳는다.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부각되는 사회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로 눈을 돌려야 한다. 설씨녀 이야기에서 보듯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야말로 그 어떤 특별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몇몇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르신 자서전 쓰기 지원사업처럼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러티브화 할 수 있는 기회를 폭넓게 제공해야 한다. 경북콘텐츠진흥원과 안동시가 ‘2019 락유(樂遊) G-콘텐츠 누림터 사업’을 통해 지역을 소재로 한 전래동화 만들기 같은 콘텐츠 제작 지원에 힘쓰는 것도 매우 좋은 정책사례다. 우리는 모두 이 시대의 설씨녀와 가실이다.
이정미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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