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9> 입암면 연당리 한후정

  • 박관영
  • |
  • 입력 2019-10-17   |  발행일 2019-10-17 제14면   |  수정 2021-06-21 17:58
송백의 형상으로 시 읊던 곳, 주렴 끝 외로운 달처럼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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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입암면 연당리와 청기면 저리가 연접한 곳에 위치한 한후정. 부연 공원 연못에 비친 한후정과 나무, 뒷산의 모습이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후(寒後)는 추위가 있은 뒤에야 소나무가 맨 늦게 시드는 기질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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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김여양의 정자인 한후정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우측은 온돌방, 가운데는 2칸 규모의 대청방으로 구성돼 있다.

 

 

영양 입암면 연당리와 청기면 저리가 보이지 않는 경계로 나뉘는 자리에 청계천(동천 혹은 큰 개울)이라 불리는 물길이 크게 굽는다. 물굽이는 벼랑을 세우고 그 아래 깊은 소를 이뤄 부연 또는 가마소라 불린다. 천변에는 꽤 넉넉한 들이 펼쳐져 있는데 부연의 남쪽 특별히 풍취가 좋은 자리에 정자 하나가 서있다.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여양(金汝陽)의 정자 한후정(寒後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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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후정 현판.

학문 깊고 청렴 숭상 경주김씨 김여양

벼슬 마다하고 자연 풍치 벗삼아 지내
충북서 영양으로 입향 후 집성촌 이뤄

‘추워진 후 소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논어 구절에서 한후라는 명칭 딴 정자
현재 건물은 1963년에 후손들이 재건
좌측엔 자그마한 솔숲, 정면에는 연못


 

#1. 경주김씨 김여양

김여양은 선조 때 사람으로 신라 경순왕의 28세손이자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상촌(桑村) 김자수(金子(自)粹)의 8세손이다. 그는 학문이 깊었고 청렴과 절개를 숭상해 일찍부터 벼슬의 길을 마다하고 자연의 풍치를 벗 삼아 지냈다고 한다. 원래 충북 영동의 심천면(深川面) 각계리(覺溪里)에 살았는데 영양 청기면 저리(苧里)로 입향하였다.

저리는 모시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모시골(苧谷) 또는 저동(苧洞)이라 불렸다. ‘북부지방에서 나는 모시 중 가장 질이 좋은 모시는 청기면 저리 모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리의 모시는 여름철 양반들의 한복과 두루마기 감으로 사용되었고 자연히 마을의 살림살이는 넉넉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김여양이 마을로 들어올 때 한산 모시 씨를 갖고 왔다고도 한다. 그가 입향한 이후 마을은 경주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 동쪽 끝에는 김여양을 비롯한 조상의 제례를 위해 마련한 재실과 경주김씨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저리 모시골의 동쪽 하천 변에 김여양의 정자인 한후정이 있다. 청기면 저리는 남쪽으로 입암면 연당리와 연접해 있는데, 현재 한후정의 주소지는 연당리다.

논어(論語)에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구절이 있다. 한후정은 여기에서 ‘한후(寒後)’라는 명칭을 따왔다. 이것은 추위가 있은 뒤에야 소나무가 맨 늦게 시드는 기질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이는 태평한 때에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시사하며 나라가 어지러울 때 비로소 소인과 군자가 구별되고 나라가 위급한 때 충신(忠臣)과 열사(烈士)와 의사(義士)를 알게 된다는 의미다.

김여양은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송백(松柏)의 형상을 취하여 자신의 뜻을 보인 것이다. 그는 한후정에서 아침저녁으로 시를 읊조리고 유유자적하면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현재의 한후정은 1963년에 지어졌다. 덕은(德殷) 송재직(宋在直)이 지은 ‘한후정기(寒後亭記)’에 정자를 건립하게 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공이 살던 시대에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이 옛터를 지키고는 있으나 공이 평소에 거처하던 당은 오랜 세월에 폐허가 됨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 옛터를 찾아 정자 하나를 세우고 당시의 당호(堂號)를 건 다음 동현(東賢) 익환(益煥)으로 하여금 나의 글을 청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2. 한후정

한후정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이 약간 특이한데 좌측에 2칸 반 규모의 온돌방이 ‘ㄱ’자 모양으로 구성돼 있고 가운데에는 2칸의 대청방, 우측에는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에는 좌측의 온돌방을 제외하고 툇마루로 열었는데 앞쪽과 측면으로 쪽마루를 연장시켜 마루를 넓혔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우측에는 외여닫이 우리판문을 달았다.

대청의 정면에는 네 짝 여닫이 세 살 청판문을 달았고 배면에는 두 짝 여닫이 우리판문을 달았다. 좌측의 온돌방에는 정면에 두 짝 여닫이 띠살창문을 달았으며 측면에는 외여닫이 띠살문과 두 짝 여닫이 띠살창문을, 툇마루 쪽에는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온돌방끼리 접한 곳은 벽 없이 미서기 문지방만 남아 있어 공간을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우측 온돌방에는 정면과 대청 쪽에 두 짝 여닫이 띠살창문을 달았고 측면에는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한후정은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담장이 방형으로 둘러져 있으며 전면 우측에 사주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였다.

상량문은 풍산(豊山) 류현우(柳賢佑)가 썼으며 툇마루에는 ‘한후정’ 편액이 걸려 있다. 정자에는 김여양이 쓴 한후정 원운(原韻)인 ‘꿈 깨어 고향을 생각하다(夢覺憶覺溪里)’라는 시판이 걸려 있다.

‘고향을 떠난 지 몇 해이던가/ 돌아가고 싶어도 나 혼자 여기 있네/ 님 그리움에 잠 못 이루면서도/ 강학하고 싶은 생각 또한 깊기만 하네/ 정학에 보탬이 되지 못함 못내 부끄러운데/ 부질없는 영예만 훔칠까 두렵구나/ 천리 내 고향 꿈 깨고 나니/ 외로운 달하나 주렴 끝에 떠있네.’

담담하고 솔직한 문장 속에서 고매하고 맑은 성정의 인물이 그려진다.

#3. 한후공원, 부연공원

한후정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교남의 영양은 본래 산수의 고을이라 일컬어 왔으니, 정령(精靈)이 아름답고 기운이 맑기로는 저동(苧洞)을 최고로 꼽는다. 산은 부용봉(芙蓉峯)과 옥녀봉(玉女峯)이 병풍처럼 펼쳐졌고, 물은 곡강(曲江)과 부연(釜淵)이 띠처럼 돌아 흐른다. 탄금대(彈琴臺)와 사현암(思賢巖)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하며, 오래된 잣나무와 소나무는 푸른 일산을 서로 맞댄 듯하여, 안으로는 널찍하고 밖으로는 빽빽하며, 앞면은 험준하고 뒷면은 평평하여 석인(碩人)과 군자(君子)가 은거하기에 마땅한 곳이다.’

한후정이 자리한 땅의 풍광을 조곤조곤 알려주는 이 문장과 함께 정자 주변을 바라보면 비록 각각의 이름들이 가리키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공감되는 심상이 생겨난다.

한후정의 좌측에 자그마한 솔숲이 있다. 입구에는 2001년 청기면에서 세운 ‘부연공원’ 표지석이 서 있다. 숲속의 산책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동천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부연의 짙은 소가 보인다. 부연과 옥녀봉은 서로 관통되어 있다는 전설이 있다. 몇 걸음 만에 솔숲을 빠져나오면 한후정이 보인다. 정자 앞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우측에 2003년에 세웠다는 한후공원(寒後公園) 비석이 있다. 공원이 청기면과 입암면에 걸쳐 있어 두 개의 이름이 생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노자는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보고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본다’고 했다. 연못 속에 먼 뒷산과 한후정이 오롯하다. 옛날 성정 맑았던 이의 정자가 주렴 끝에 뜬 외로운 달처럼 보인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 영양군지. 영양군청.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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