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8] 출옥, 그리고 다시 영화에 전념하다

  • 인터넷뉴스부
  • |
  • 입력 2019-10-10   |  발행일 2019-10-10 제13면   |  수정 2019-10-10
카프 해산되자 전향 후 출옥…시나리오·잡지·영화제 활동 왕성
20191010
① 신건설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풀려난 김유영은 동아일보 1937년 8월22일부터 28일까지 시나리오 ‘백란기’를 연재하며 다시 영화에 전념했다. ② 1937년 7월2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유영의 칼럼 ‘은막의 기라군성’. ③ 출옥 후 김유영은 ‘영화작가’ ‘영화시대’ 등 영화잡지 출간에도 동참했다. 특히 1937년 10월 ‘영화보’ 창간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영화보 창간 소식을 전한 1937년 10월29일자 동아일보.

#1. 카프의 해체, 뒤이은 전향

김유영이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935년 6월, 카프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즉 해산이냐 유지냐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사실 카프는 김유영이 복귀하기 훨씬 이전부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카프(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는 1925년 8월에 박영희(朴英熙)·김기진(金基鎭)·이활(李活)·김영팔(金永八)·이익상(李益相)·박용대(朴容大)·이적효(李赤曉)·이상화(李相和)·김온(金穩)·김복진(金復鎭)·안석주(安碩柱)·송영(宋影) 등이 뜻을 모아 일으킨 단체였다. 이후 카프는 1926년 1월에 준기관지 ‘문예운동’을 발간해 성격과 활동 내용을 대외에 드러낸 데 이어 1927년 9월에는 전국맹원총회를 열었다. 무려 1백여명의 문인이 참가한 이날 총회에서 카프는 강령으로 ‘일체의 전제세력과 항쟁한다. 우리는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를 채택하고 박영희를 회장으로 뽑은 뒤 문학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나갔다. 바로 이 즈음에 김유영이 열아홉의 나이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들어가면서 카프와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프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프로문학(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한 의견 차이였다. 그러던 1931년 6월, 박영희(朴英熙·소설가이자 평론가·1901~?)와 김기진(金基鎭·평론가·1903~1985)을 비롯한 카프 맹원 70여명이 신간회(新幹會) 문제로 검거되고야 말았다. 당시 독립운동단체였던 신간회는 창립의 양 주체인 민족주의좌파와 사회주의자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진 상황이었다. 결국 1931년 5월에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카프의 핵심 멤버들이 잡혀 들어간 것이다.


1년6개월만에 자유 찾고 대구 내려와
‘코레아영화제작소’ 도움 줬지만 좌절
조선일보 ‘영화서신’·동아일보 ‘백란기’
1936∼37년엔 시나리오 연재에 몰두
잡지 영화보 창간 동참…독자들 반겨
조선 역사상 첫 영화제 성사에도 도움



설상가상 1934년 1월8일에는 카프의 중추였던 박영희가 동아일보에 올린 ‘최근 문예이론의 신(新)전개와 그 경향’을 통해 과거 조선 프로문학에서의 “예술은 무공(無功)의 전사(戰死)를 할 뻔하였다.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다”는 퇴맹 선언을 남기고 카프에서 떠나버렸다. 그 와중에 극단 ‘신건설’사건까지 터져 카프로서는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게 돼버렸다. 이에 카프의 이론적·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던 김기진이 ‘카프 해산계’에 서명·날인하면서 카프는 마지막을 고했다.

수감 중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유영은 세상의 혹독함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결론은 전향이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보름 뒤에 이어진 1935년 12월9일 선고공판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풀려난 것이다. 전향을 약속한 데 대한 처벌 완화였다. 1년6개월 만에 자유를 찾은 김유영은 대구의 본가로 돌아갔다.

#2. 어쨌거나 그에겐 오직 영화뿐

나빠진 건강을 추스를 새도 없이 김유영은 ‘코레아영화제작소’ 창립에 힘을 보탰다. 이원식·박천민·김해생 등이 주도한 가운데 기술고문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어서 김유영의 총지휘 아래 박천민의 연출로 영화 ‘황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원식과 박천민이 모종의 사태에 연루돼 구금되면서 ‘황혼’은 말 그대로 엎어졌다.

이후 김유영은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표도 했다. 그 첫 번째가 1936년 12월24일부터 2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시나리오 ‘영화서신(映畵書信)’이었다. 이어서 1937년 8월에는 22일부터 28일까지 동아일보에 시나리오 ‘백란기(白蘭記)’를 연재했다. ‘녹지(綠地)의 평선(平線)을 네 사람의 젊은이가 아득한 저편에서 걸어온다’로 시작하는 ‘백란기’의 앞부분에 김유영은 ‘짧은 변(辯)’을 적어놓았다.

- 신여성을 그린 이 ‘백란기’는 참된 의미에서 보면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통일성 없는 일종의 스케치로 전체의 가교 조절과 이데아의 흐름이 분명치 못하기도 합니다. 그저 과도기에 있는 신여성이 생활 속에서 드러낸 심리와 성격을 가볍게 터치하고 넘어갔음을 미리 말해 둡니다.-

같은 기간에 영화소설 심사에도 나섰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영화소설현상공모’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작품을 모으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영화소설은 소위 영화소설이라고 일컬어온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다르다. 영화와 문학과의 유기적 종합이 가능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의 독물(讀物), 즉 읽을거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지면에 게재하면 읽는 영화가 되고 시나리오 식으로 각색하면 촬영대본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전 조선의 저명한 승경고적(勝景古蹟)을 화면에 되도록 많이 나타나게 하되 이야기의 구성을 무리 없이 흥미롭게 하고, 승경고적에 얽힌 로맨스를 솜씨있게 엮되 유머러스한 장면도 적당히 섞어 넣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응모된 작품은 100여편에 이르렀다. 4차례의 예선을 통해 5편을 추린 동아일보는 최종심을 담당할 심사위원으로 7명을 위촉했다. 영화계에선 김유영과 서광제(徐光霽·영화평론가·1901~?), 문단에서는 유진오(兪鎭午·소설가이자 법학자·1906~1987)와 유치진(柳致眞·극작가이자 연출가·1905~1974), 회사 측에서는 서항석(徐恒錫·독문학자이자 극작가·극예술연구회 창립동인·1900~1985)·정래동(丁來東·중국문학 연구자·1903~1985)·이무영(李無影·농민문학 대표작가·1908~1960) 등이었다. 이 중에서 유진오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이 한 자리에 모여 심사를 진행한 결과 한 편이 선정되었다. 신인 최금동(崔琴桐)의 ‘환무곡(幻舞曲)’이었다. 이 작품은 곧 김유영과 귀한 인연을 맺게 된다.

#3. 영화를 위한 잡지, 영화를 위한 축제

김유영은 영화잡지 출간에도 무척 공을 들였다. 시작은 1937년 6월에 시나리오 문학의 건설촉진과 진실한 영화 비평을 위해 발행한 월간잡지 ‘영화작가(映畵作家)’였다. 그리고 1937년 11월7일에는 휴간 상태였던 월간잡지 ‘영화시대’의 속간에도 동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0월에 창간한 ‘영화보(映畵報)’였다. 1937년 10월29일에 이를 환영하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렸다.

-영화출판기관 하나 갖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던 바, 업계의 중진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 제씨의 발의로 월간잡지 ‘영화보’가 발행된다고 한다. 현재 창간호가 인쇄 중에 있으며 지국도 곧 모집할 예정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보는 감독·촬영기사·시나리오 작가들이 편집위원을 맡은 만큼 영화 제작에 관련된 문제들을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다뤘다. 제1집의 경우에는 서광제의 ‘프로듀서론’, 박기채의 ‘조선 영화 이상론’, 한인택의 ‘영화 원작과 현실성’, 유영삼으로 추정되는 R.Y.S의 ‘촬영소의 조직과 기획 과정’ 등이 지면을 채웠다.

독자들도 반겼다. 1937년 11월6일에 동아일보에 실린 ‘투서함(投書函)’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쁜 소식이다. 빈약한 영화계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다. 조선 영화는 30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영화잡지 하나가 없었다. 3년 전에 ‘영화시대’가 간행되긴 했으나 곧 없어지는 바람에 다시 암흑 속에서 헤매게 되지 않았던가. 영화출판기관 하나 없는 영화계의 빈약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던 작금의 상황에서 영화계 중진들이 이제야 잠꼬대에서 깨어난 모양이니 참으로 기뻐 마지않는 바이다. 김유영씨가 발의했다는 ‘영화보’가 속히 발행되기를 고대한다.-

이 외에도 김유영은 ‘은막의 기라군성(綺羅群星)’을 비롯한 칼럼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 어느 새 열정적인 생활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무엇보다 김유영의 큰 공은 영화제가 성사되는 데 힘을 실은 일이었다. 1938년 11월에 개최된 조선 역사상 첫 영화제인 조선일보 주최 조선영화제(현 청룡영화상 전신)가 그것이었다. 조선일보사 강당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전시회와 상영회를 겸해 개최된 조선영화제는 김유영 외에 이명우(李明雨), 오영석(吳榮錫), 이신웅(李信雄), 이귀영(李龜永), 윤묵, 서병각(徐丙珏), 이기세(李基世), 안종화(安鍾和), 손용진(孫勇進), 김정혁(金正革), 김태진(金兌鎭), 윤봉춘(尹逢春) 등이 위원으로 활동했다.

장안이 떠들썩한 가운데 치러진 행사에서 무성영화 ‘아리랑’과 ‘임자 없는 나룻배’, 발성영화 ‘심청전’과 ‘오몽녀’ 등이 주요 입상작에 이름을 올렸고, 관람객 인기투표를 통해 세 작품이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그리고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각색한 시나리오와 나운규의 유고 시나리오 ‘황무지’ 등이 전시되었다.

이처럼 김유영은 잡지건 축제건 영화와 관련된 현장이면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핵심 인사였다. 그의 나이 이제 서른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향토작가연구; 김유영의 삶과 영화 세계, 이강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