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함안 악양생태공원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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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4   |  발행일 2019-10-04 제36면   |  수정 2020-09-08
빛에서 짜낸 핑크빛 부드러움 속으로 빠지다

구름 한 점 없는 오전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만족스러운 늦잠에서 깨어나듯 구름은 서쪽하늘로부터 기상하기 시작했다. 태양빛은 뜨겁고 눈부셨으나 대기에는 청량감이 있었다. 주차장의 빈자리를 찾는 동안, 모자를 쓰거나 양산을 든 여자들과 커다란 카메라를 금덩이처럼 소중하게 안아 든 남자들이 빠르게 뒷모습을 보이며 저편으로 달아났다. 운 좋게 주차를 한 뒤 차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냄새가 덮쳐왔다. 폭신폭신 잘 익은 밀가루의 향, 그것은 핫도그 냄새였다. 주차장을 벗어나자 아직 말간 하늘을 배경으로 예쁘장한 푸드 트럭이 조형물처럼 서 있고 트레이에는 커다란 핫도그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옴폭하게 펼쳐진 대지에 누군가 과감하게 자른 색종이 같은 꽃밭이 떨어져 있었다. 저것이 ‘핑크뮬리’ 밭이구나.

악양생태공원 ‘핑크뮬리’
벼과 식물…오래된 싸리 빗자루 감촉
우리말로 ‘분홍쥐꼬리새’ 예쁜 이름
멀어지면 색연필로 그린 붉은 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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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생태공원의 골드뮬리. 꽃밭 산책길 중간중간에 좋은 글귀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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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생태공원의 둑길. 남강을 내려다보며 걷는 코스모스 꽃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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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생태공원의 핑크뮬리. 벼과의 다년생 풀로 우리말로는 ‘분홍쥐꼬리새’ 다.

경남 함안의 대산면 서촌리(西村里) 남강 변에 악양생태공원이 있다. 서촌리는 동쪽, 남쪽, 서쪽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낮은 침식분지가 비교적 넓고 둥글게 형성되어 있는데 바로 그 분지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과 수로, 잔디광장, 둑길, 꽃밭, 놀이터, 정자, 카페, 체험장 등 공원에서 떠올릴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을 갖췄지만 아직 신생아에 가까운지라 야금야금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있고 나무들은 어리다. 떼 지어 펼쳐진 핑크색의 유혹은 강력한 것이지만 성급함의 뒤통수를 잡아끌 듯 가장 가까운 연못으로 눈길을 준다. 연못에서부터 수로가 깊이감 있게 흘러나가고 그 우측으로 둑길 아래를 따라 꽃밭이 펼쳐져 있다.

코스모스, 골드뮬리, 그리고 핑크뮬리. 꽃들의 향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가을 들판에서 잘 익은 벼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핑크뮬리의 핑크빛은 땅에서 태어났다기보다 오히려 빛에서 짜낸 기체 같은 부드러운 유동성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약간 까슬거리는, 오래 사용한 싸리 빗자루 같은 감촉이었다.

핑크뮬리는 벼과에 속하는 식물이라고 한다. 습한 기후, 더위, 가뭄 등을 잘 견딜 수 있고 겨울을 날 수 있는 강한 풀이다. 미국의 서부나 중부 지역의 따뜻한 평야에서 자생하는 여러해살이풀이지만 언제부턴가 전 세계에서 조경용으로 식재된다.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가을이면 핑크뮬리 소식으로 난리다. 맛은 보지 않았다. 아무거나 입에 넣는 버릇은 십대까지만 용서된다.

핑크뮬리는 우리말로 ‘분홍쥐꼬리새’다. 꽃 이삭이 쥐꼬리를 닮은 풀이란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의미는 동의할 수는 없으나 분홍쥐꼬리새라는 이름은 예쁘다. 여름에는 푸른색이다. 핑크빛 아래에 남아있는 푸른빛이 청보리처럼 맑다. 가을이 되면 지금처럼 분홍빛에서 자줏빛의 꽃차례를 이룬다. 꽃은 한 꽃에 암술과 수술이 모두 들어 있어 외롭지 않다. 가까운 핑크뮬리는 안개처럼 어렴풋하지만 그것들이 한데 모여 원경으로 멀어지면 색연필로 힘주어 그린 것 같은 붉은 지평선을 그린다. 골드뮬리는 처음 보았다. 고운 모래빛이다. 작은 낙엽들이 그 속에 떨어져 땅으로 도달하지 못한 채 포획되어 있다. 안타까워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은 몹시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둑길로 오르면 남강이 내려다보인다. 강 건너는 의령 적곡리다. 둑길 따라 서쪽으로 나아간다. 코스모스 꽃길이다. 지난 가을태풍으로 어떤 코스모스 무리들은 종아리를 다 내어놓고 누워 있지만 싱그럽게도 꽃을 피웠다. 유치원 아이들이 꽃길을 걷는다. 여기저기서 중국말이 들린다. 아이를 안거나 배가 부른 젊은 그녀들은 어디서 왔을까. 한 노인이 드론을 날린다. 허연 정수리가 가감 없이 폭로되겠군. 둑길 끝 작은 동산에 팔각정자가 있다. ‘악양 노을정’이다. 정자 앞에는 정자를 건립하면서 기념으로 심은 나무 백일홍 3그루가 서 있다. 꽃은 졌다. 정자 옆쪽으로 남강변 벼랑을 따라 데크 길이 이어진다. ‘악양루(岳陽樓)’로 가는 길이다. 등산하듯 계단을 오르내리기를 몇 분, 머리위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악양루’ 현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악양루와 악양나루
절벽에 앉아 있는 팔작지붕 ‘악양루’
천변 둑방·너른 들판 눈부시게 펼쳐져
나루에 깃든 처녀 뱃사공 사연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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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변 벼랑에 앉은 악양루. 철종때 세워진 것으로 6·25 전쟁 이후 중수했다.

함안천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바로 그 앞 절벽에 ‘악양루’가 앉아있다. 악양루는 조선 철종 8년인 1857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원래는 ‘의두헌(倚斗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후 6·25 전쟁 때 거의 폐허가 된 것을 중수했다. 악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누각 안에는 상량문과 중수기를 비롯한 많은 편액이 걸려 있고 기둥마다 주련이 빼곡하다. 마루는 누군가가 시시때때로 닦는 듯 반들거린다. 악양루는 두보나 이백, 백거이와 같은 많은 시인들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중국 악양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그곳만큼이나 이곳이 아름답다고. 멀리 자굴산, 한우산, 여항산,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한눈에 보인다. 가까이로는 천변의 둑방과 너른 들판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그리도 곱단다.

이곳의 남강 건너편은 함안 법수면의 악양마을이다. 길게 이어진 악양둑방이 푸르고 몇 해 전 나대지였던 강변의 땅은 밭이 되어 있다. 악양둑방에 지금쯤 코스모스가 가득하겠다 생각했는데 꽃은 보이지 않는다. 2008년부터 시작했던 ‘10리 둑방 테마 관광 사업’은 10여 년 만에 스르르 자취를 감춘 듯하다. 옛날에는 함안의 악양과 의령의 적곡을 잇는 악양나루가 있었다. 6·25전쟁 때 그 나루에는 전쟁에 나간 오빠를 대신해 노를 저었던 두 처녀가 살았다고 한다. 1953년, 고(故) 윤부길이 단장으로 있던 유랑 악단이 함안 가야정에서 공연을 마치고 악양루 근처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때 그는 악양나루의 처녀 뱃사공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가슴에 담아 두었던 사연은 1959년 노래가 되었다. 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 황정자 노래의 ‘처녀뱃사공’이다. 악양루 서편 악양교 근처에 처녀뱃사공 기념비가 있다. 악양생태공원 안에도 기념비가 있다.

함안천은 남강과 하나 되고 동쪽으로 달려 낙동강과 만난다. 물은 흐르며 들을 내어놓고, 물은 휘돌며 절벽을 세운다. 사람들은 그 들에 기대 살고 그 절벽에 정자를 매달아 들을 내다본다.

‘낙동강 강바람이 앞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 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네마 어머님 그 말씀에 수줍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그녀들이 기다리던 오빠는 전사 통지서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녀들은 시집을 갔겠지. 악양루 근처 악양루 가든에는 그 오빠의 아들이 산단다. 강은 흐르고, 가슴에는 물결이 이는 듯 하나 세상은 평온하다.

▨ 여행정보

대구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창녕방향으로 가다 남지IC에서 내려 좌회전 해 가다 남지입구 오거리에서 11시 방향으로 나가 남지대교를 건넌다. 이룡삼거리에서 우회전해 가다 계내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 공단사거리에서 우회전 해 1021번 지방도를 타고 직진, 부목삼거리에서 우회전 해 직진한다. 삼거리가 나오면 우회전 해 함의로를 타고 조금 가다 구룡정사거리에서 함안·법수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대법로를 따라 직진하다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면 얼마 안가 오른쪽에 악양생태공원 이정표가 있다. 현재 입구 도로를 공사 중이지만 곧 완공될 듯하다. 길을 내려가면 마을이 나오고 악양생태공원 입간판이 서 있다. 그 앞에서 좌회전해 가면된다. 공원 입장료와 주차료는 없다. 핑크뮬리는 9월 하순부터 11월까지 절정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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