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4]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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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1   |  발행일 2019-09-11 제15면   |  수정 2019-09-11
대립·분열의 영화운동 반성…농촌과 농민의 현실 직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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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륜(火輪)’ 논쟁이후 김유영은 1931년 3월26일부터 4월17일까지 총 1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영화가(映畵街)에 입각하야’를 게재했다. 김유영은 신문 연재를 통해 화륜으로 촉발된 논쟁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고,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1931년 동아일보에 ‘영화가…’ 연재
노동자·농민 결속, 뉴스릴 촬영 주장
논문·평론 등 담은 ‘시대공론’도 발간
1932년 ‘영화예술운동의 신방향’ 발표
대다수 농민위한 농촌영화 제작 강조
부인 최정희와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아


#1.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고민

영화 ‘화륜(火輪)’으로 촉발된 논쟁의 한가운데서 김유영은 몹시 괴로웠다. 심적으로 가장 버거운 건 아무래도 대결 구도로 빠져버린 카프 대 비(非)카프의 분열과 반목이었다. 아울러 자본과 검열 등의 부분에서도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혼자 발버둥 친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에 김유영은 1931년 3월26일부터 4월17일까지 총 1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영화가(映畵街)에 입각하야’를 실었다. 이를 통해 “과거에 저지른 오류와 야합 등 나의 잘못을 청산하고자 한다. 다른 동지들 또한 집단적·개인적 난제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냉정한 태도를 갖고 엄중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서로간의 오류와 장점을 지적하고 검토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나부터가 나 자신에 대해 엄정히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복잡한 심경을 토로한 데 이어,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 의견을 밝혔다.

첫째는 노동자·농민과의 결속에 대한 강조였다. 즉 조선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 지도부가 전력을 다해야 하는 대상은 노동자·농민·화전민 등임을 명심하라는 주장이었다. 둘째는 촬영부의 구분에 대한 제안이었다. 구체적으로 연기영화반 외에 문화영화반을 두어 문화영화와 뉴스릴을 촬영하자고 했다. ‘뉴스릴’이란 당대에 일어나는 주요 사건들을 필름에 담는 기록 영화를 일렀다. 즉 효과적인 선전을 위해서는 문화영화가, 노동자와 농민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루기 위해서는 뉴스릴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카프 영화에서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셋째는 ‘이동영화반’에 대한 언급이었다. 소(小)부르주아들이 집결하기 마련인 일반 상설관이나 거대한 홀이 아니라, 공장과 농장 등을 상영 공간으로 선택해 노동자와 농민을 주 관객으로 삼자는 취지였다. 그 외에 자본주의 영화와 지배계급을 위한 영화를 있는 그대로 상영해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거나, 이를 계급주의 영화로 재편집해 상영함으로써 수익을 확보하자는 의견도 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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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이 1931년 9월1일자로 펴낸 종합지 ‘시대공론’ 창간호. 시대공론을 통해 김유영은 ‘정당한 계급운동에 입각해 나아가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과 대중성과 통속성이 부족한 글로 일관해 2호까지만 발행되고 폐간됐다.

이를 두고 김유영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일본 프로키노의 사사겐쥬는 “김유영이 추구한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목표는 영화와 대중을 결합시켜 대중을 해방운동의 참여자로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 가장 합리적인 조직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평했다.

#2. 일제의 검열 속에서 안간힘을 다하다

이러한 가운데 김유영은 1931년 9월1일자로 종합지 ‘시대공론’을 발행했다. 시대공론은 숙부 김승묵이 1925∼26년 7호까지 발간하고 중단한 ‘여명(黎明)’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김유영 본인도 자신의 첫 소설 ‘꽃다운 청춘’을 바로 여명을 통해 발표했다.

시대공론 1호는 표지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누가 봐도 시위대의 선두에 선 것처럼 보이는 깃발 든 청년의 모습을 통해 잡지가 가진 저항과 항쟁의 방향을 암시한 것이다. 이어서 김유영은 4개월 후에 발간한 2호의 권두언 ‘머리의 선언’에서 “계급분자가 첨예화한 현 단계에서 회색적 태도를 없애고 정당한 계급운동에 입각해 나아가려 한다”고 천명했다.

실린 글들의 면면 또한 더없이 진지했다. ‘험악화한 최근의 일중관계’를 비롯한 논문, ‘농민문학운동과 배포문제’를 비롯한 평론, ‘카프 분규에 대한 대중적 견해’를 비롯한 문예시평, 소설 ‘명일(明日)의 식대(食代)’를 비롯한 문학작품 등이었다. 시나리오 ‘흑색의 밤’ 등 김유영의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게 돌아갔다. 조선총독부의 검열이 가장 큰 문제였다. 멀쩡한 글이 잘려나가는 경우가 거듭 발생한 것이다. 대중성과 통속성의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한마디로 시대공론식의 글은 읽어줄 사람이 적었다.

이에 김유영은 정치·경제·사회·문예 등을 아우르고자 했던 창간호의 편집방침을 버리고, 오로지 문예물만을 취급하는 순수문예잡지로의 변화를 꾀했다. 제목도 ‘제3선(第3線)’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3호는 발간되지 못했다. 폐간이었다.

#3.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또 다른 구상

마음처럼 흘러가는 게 거의 없는 곤혹스러운 상황 속에서 김유영은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이론을 정리하고 주장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중의 하나가 1932년 2월16일에 발표한 ‘영화예술운동의 신(新)방향’이라는 글에서 드러낸 목소리였다.

“프롤레타리아영화는 오로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만 쓰여야 하는가? 계급주의적인 사회인식에 입각해 현재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기만 하면 되는가? 아니, 이는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이 당면해있는 문제이지, 맹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영화만 만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대다수의 농민을 위해 농촌영화 제작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에는 노동자보다 농민이 많다. 게다가 노동자의 생활이나 투쟁을 그리는 영화는 일종의 아지프로인데, 조선에서 아지프로적인 영화는 검열에 통과하거나 상영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아지프로’란 ‘아지테이션 프로파간다(Agitation Propaganda)’의 줄임말로 선동을 목적으로 하는 선전을 가리켰다.

“따라서 조선 프롤레타리아영화계는 농촌영화 제작에 주력해 농민의 시야와 경험을 확대하고, 그들로 하여금 시대의 흐름을 계급적으로 인지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고민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유영은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교토의 ‘동활(東活) 키네마’에서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유영은 마음을 달리 먹고 곧 귀국했다. 그리고 조선 영화계가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기에는 자본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전제 하에 새로운 구상에 들어갔다.

“연구와 교육을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 한마디로 영화 연구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주머니가 빈 상황에서 그거라고 잘 되겠는가 염려스러웠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한다는 결심으로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구인회(九人會) 결성이었다.

#4. 그의 인생에서 유일했던 여인

그 와중에 김유영은 개인적으로 큰일을 겪었다. 1932년, 아내 최정희(崔貞熙, 1912~1990)와의 사이에서 아들 익조(益祚)를 본 것이다. 그리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으나 김유영에게는 유일한 아내와 소중한 자식이었다. 무엇보다 최정희는 김유영과 정신적으로 통하는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최정희는 김유영보다 2년 앞선 1906년에 함북 성진군 예동에서 태어났다. 18세가 되던 해에 상경해 동덕여학교에 편입학했다가 다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해 졸업한 후, 서울 중앙보육(中央保育)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경남 함안의 함안유치원에서 보모로 근무하던 중 193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삼하(三河)유치원에 몸을 담았다. 그 과정에서 유치진, 김동원 등이 있던 학생극예술좌(學生劇藝術座)에 참여했는데, 이때 김유영을 만났다. 당시 김유영은 영화 ‘혼가’의 흥행이 실패한 뒤 일본의 여러 영화사를 돌며 공부하고 있던 차였다.

이후 귀국해 김유영과 결혼한 최정희는 종합지 ‘삼천리(三千里)’에 입사한 데 이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경향파 성격의 내용들이었다. 경향파는 예술적 부분보다 계몽이나 이념에 목적을 둔 집단을 이르는 말로 ‘카프’가 대표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최정희가 카프의 회원인 건 아니었다.

그러던 1934년 카프가 강제로 해산되고 검거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사건에 연루돼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 해 뒤에 석방되었다. 이후 1937년에 단편소설 ‘흉가’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김유영과는 형식적인 부부 사이일 뿐이었다.

시인 이상(李箱)에게서 연서를 여러 통 받았을 정도로 많은 문학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최정희는 김유영이 세상을 떠난 후 시인 김동환(金東煥)과 재혼했다. 최정희와 김동환 두 사람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어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도정, 최정희·지하련. 향토작가연구; 김유영의 삶과 영화 세계, 이강언. 유실된 카프 영화의 상징; 김유영 론, 김종원. 카프의 김유영과 프로키노 사사겐주 비교연구, 이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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