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18] 사랑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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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9   |  발행일 2019-08-29 제21면   |  수정 2019-08-29
性소수자의 사랑, 미국선 ‘해피엔딩’ 한국선 ‘새드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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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작년 한 해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에 살았다. 사방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어 도시라기보다는 시골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그곳의 공공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는데, 하루는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도서관에서 정기적으로 여는 주제 도서 전시 안내와 책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주제는 ‘LGBTQ’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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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주인공, 동성과 행복을 꿈꾸지만
따가운 시선 못견디고 자살 시도

美 소설 ‘레스’ 고통없는 사랑 강조
게이라고 특별한 의미 부여도 안해
양국 문화의 차이가 작품흐름 좌우

어린 아이에서 노인들까지 도시의 주민들이 사랑방처럼 이용하는 공공도서관의 책 전시 주제가 ‘LGBTQ’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LGBTQ’가 뭔가. 여성 동성애자(Lesbian), 남성 동성애자(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에 성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은 사람(Queer)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요컨대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 곧 성소수자 전체가 ‘LGBTQ’이다. 성 정체성의 다양성을 사람들 간의 차이로 인정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에 나름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가족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도서관의 출입구에 ‘LGBTQ’를 주제로 하여 책들이 전시된 것을 보니 적잖이 놀라웠다. 주로 아이와 함께 드나들던 도서관이었으니, 부모 자식 간에 성애(sexual love)를 화제로 삼게 된 듯한 당혹감도 한몫했던 것 같다.

미국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것이 2015년 6월이었고 그 전에도 30여 개 주에서는 동성 간에도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니 시골에 가까운 소도시의 공공도서관에서 ‘LGBTQ’를 주제로 한 책들을 전시하는 것도 자연스러웠으리라. 하지만 한국에서 50여 년을 살다 잠시 들른 타국에서 그러한 장면을 볼 때, 그 인상은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기억을 새삼 일깨워 준 최근의 소설 두 편이 있다. 박상영의 중편소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과 앤드루 숀 그리어의 ‘레스’(은행나무, 2019)이다.

이 두 작품은 공통점과 더불어 차이를 갖는다. 둘 다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이 첫째 공통점이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2019년 올해 10회째를 맞는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다. ‘레스’는 저널리즘 상으로 전 세계에 유명한 퓰리처상의 2018년 픽션 부문 수상작이다. 둘째 공통점은, 짐작하는 대로 두 작품이 그려내는 주인공이 성 소수자라는 점이다. 정확히는 남성 동성애자, 게이다. 차이점 또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작품의 배경이 한국과 미국이라는 것이 하나고, 남성 동성애자가 그려지는 방식이 현격히 다르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이 마지막 사항, 게이를 다루는 소설이라는 사실은 같지만 주인공의 형상화나 작품의 주제 등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 이 글을 쓰게 했다.

박상영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선배와 키스를 하다 엄마에게 들켜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된 적이 있는 게이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모친의 그런 처사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상태로, 인턴 사원이었다가 정규직에 탈락해 실직 상태에 처한 20대 중반에 암 환자인 엄마를 간호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인문학 교양과정을 수강하다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과거 운동권이었다가 지금은 출판사 편집자로 외주 작업을 하는 열두 살 연상의 그에게 눈이 먼 것이다. 주인공의 상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사랑의 열병에 사로잡힌 사람의 그것이다. 병실에 잠든 엄마를 내버려둔 채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새벽마다 그를 찾을 만큼 ‘완전히 미쳐’(41쪽) 있었으며, “그를 만나는 시간은 새벽의 몇 시간에 불과했으나 나의 하루는 그 짧은 시간으로 말미암아 완벽히 재편되었다”(46쪽)고 할 정도가 된다. 우리 또한 경험했듯이, 말 그대로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그 상대가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라는 것뿐이다.

주인공이 사랑한 ‘그’가 우리들의 감각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데서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발생한다. ‘그’의 경우 대낮의 길에서나 공원에서 주인공과 함께 걷는 것을 몹시 불편해 한다. 그들이 함께 있다가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상황은 더욱 불편해진다. 주인공은 그와 함께 파스타를 먹고 싶어 하지만, 그는 ‘남자 둘이 파스타 먹는 거’(68쪽)가 이상하니 다른 것을 먹자 한다. 사랑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주인공과 세상의 잣대를 의식하는 그의 차이가 차차 두드러지면서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되고, 주인공은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 소설이 보여 주는 핵심이 여기 있다. 게이로 태어나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을 원했을 뿐인데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나 그럴 수 없는 것,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지지만 상대가 동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끝내 자살을 시도해야 하는 것, 이러한 상황 속에 이 땅의 성 소수자가 있다는 사실을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 보여주고 있다. 간명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외엔 별다른 바람도 욕심도 없는데 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비판이 이 소설의 주제이다. 이는 소설을 쓰는 현재의 주인공이 품는 바람에서 확인된다. 자신의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자신을 이런 형태로 낳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 놓은 뒤 그런 자신을 밀어내고 돌아오지 못할 곳에 놔두어 버린 엄마에게 사과를 좀 받고 싶은 바람 말이다(67, 89쪽).

앤드루 숀 그리어의 ‘레스’에서는 이런 눈물겨운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서 레스는 50이 다 되어 한물 간 군소 작가일 뿐이다. 그의 현재 상황은 좋지 않다. 나이 든 시인과 함께 살며 20대를 보냈던 그는, 친구 카를로스 펠로의 아들 프레디에게 사랑을 느끼며 연인도 아니고 연인이 아닌 것도 아닌 상태로 최근 9년간을 지냈다. 작품의 주요 서사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프레디의 청첩장을 받았지만 그 결혼식을 피하고자 노력한 레스가 세계를 일주하는 여정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사랑이 버려진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프레디의 곁을 떠난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자신에 대한 레스의 사랑을 깨달은 프레디가 결혼 예정자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레스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학 및 문화 관련 이벤트로 세계를 돌며 레스가 느끼고 겪는 일들이 살아가는 일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문화예술 판의 속내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이 소설의 주제는 정확히 사랑에 있다. 함께 있을 때는 깨닫지 못하다가 헤어지고 난 후에 절실히 알게 되는 참된 사랑을 회복하는 이야기, 이것이 ‘레스’의 주제다.

한국의 독자로서 놀라운 점은, 소설 ‘레스’의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사랑이 게이의 사랑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아서 레스가 20대였을 때도 50을 눈앞에 둔 지금도, 그리고 레스의 주변 인물들 누구에게서도, 이른바 사회의 따가운 눈총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소설 텍스트에 없다고 실제 현실에서도 없다고 한다면 자료에 맹목인 정신나간 소리에 불과하게 되겠지만, 2018년에 이 소설을 발표한 앤드루 숀 그리어는 오로지 사랑에 집중할 뿐이다. 그 사랑을 누가 하고 있는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사랑의 주인공이 게이라는 사실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가 생기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썼다 할 만하다.

이러한 작품 양상의 차이가 미국과 한국 사회의 차이를 보여준다. 달력상으로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성애와 관련한 문화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두 나라의 차이가 이 두 작품의 양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레스’와는 다른 동성애의 양상을 다룬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의미있는 기록이 된다. 10년 혹은 한 세대 후에 돌아볼 때 아쉬운 과거의 기록으로 간주될지라도 말이다. 물론 아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 특정 시대의 양상을 형상화하여 영원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 예술의 한 역할이라는 점에서,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제 몫을 다한 소설인 까닭이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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