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배롱나무꽃 단상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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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8   |  발행일 2019-08-28 제30면   |  수정 2019-08-28
짙은 녹음으로 덮이는 여름
백일간 붉은 꽃 피우는 배롱
예로부터 많은 사랑 받아와
달구벌대로에 심어 가꾸면
대프리카의 명물거리 될 듯
[동대구로에서] 배롱나무꽃 단상

배롱나무꽃을 각별히 좋아한다. 봄꽃 중에는 매화를 많이 좋아하고, 배롱나무꽃은 여름이 되면 보고싶어지는 꽃이다. 배롱나무는 꽃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자체도 좋아한다.

배롱나무는 여름철 내내 강렬하면서도 예쁜 꽃을 피워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기분을 즐겁게 한다. 꽃이 핀 모습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줄기의 겉과 속이 같고 해마다 허물을 벗는 등 생리적 특징 덕분에 예로부터 선비와 스님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나무이기도 하다. 꽃을 피운 배롱나무는 사진작가들의 발길도 바쁘게 한다.

이번 여름에는 필자도 배롱나무를 찾아 이곳저곳 다녔다. ‘산사 미학’ 연재기사의 소재로 산사 배롱나무를 선택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밀양 표충사, 승주 선암사, 순천 송광사, 경주 기림사, 계룡산 신원사 등의 배롱나무를 만나러 갔다. 35℃를 넘나드는 무더위 속에 따가운 땡볕을 받으며 돌아다녔다. 기사를 위한 취재 목적이었지만, 배롱나무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할 에너지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에는 세상이 온갖 나무와 식물이 만들어내는 짙은 녹음으로 뒤덮인다. 배롱나무는 그 속에서 붉은 꽃(보라색과 흰색 꽃도 있음)을 흐드러지게 피워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오래 된 배롱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주변은 배롱나무꽃 천지로 변해 버린다. 많은 나무 중 오직 배롱나무만이 맑고 붉은 빛깔의 꽃을 수천 수만 송이 피워,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빼앗아 버리는 것을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이렇게 많이 돌아다닌 것은 더 멋진 배롱나무를 보려는 욕구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 갈증을 해소해주는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기는 했다. 영동 백화산에 있는 작은 사찰 반야사의 마당 한쪽에 서있는 배롱나무다. 지난 광복절 날이었다. 처음 만나는 배롱나무였는데, 수령 500년이 넘었다는 배롱나무 고목 두 그루가 한창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황홀했다. 비가 왔다 멈췄다 하는 날씨였는데, 꽃잎이 많이 떨어져 나무 아래도 고운 붉은색 비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사람이 끊이지 않아 호젓하게 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느긋하게 배롱나무와 오랫동안 함께했다. 가까이서 멀리서.

한편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래를 반복해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반야사 배롱나무를 보지 못했다면 그렇게 많은 배롱나무를 만나고도 계속 미진한 마음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니, 무엇을 많이 좋아하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퇴계 이황이 기호와 욕심(嗜慾) 절제를 마음(心氣)의 병을 다스리는 법으로 꼽은 이유를 알 듯하다.

그건 그렇고 대구에도 관심만 가지면 주변에서 쉽게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도 있고, 가로수 중에도 적지 않다. 신숭겸 유적지와 하목정, 두사충 묘지 등 곳곳에서도 배롱나무 고목을 만날 수 있다. 좋아하는 것들이 주위에 많아지면 그 사람의 삶도 더 윤택해질 것이다. 보면 즐거운 것들, 만나면 반가운 사람들이 주위에 많아질수록 삶의 행복도가 높아질 것이니 많이 만들 일이다.

그리고 대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30㎞가 넘는 달구벌대로에 배롱나무를 심어 ‘배롱 대로’를 만들면 어떨까 싶다. ‘대프리카’로 알려진 여름 대구의 명물 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달구벌대로 중앙분리대 화단에 붉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를 중심으로 보라색과 흰색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를 섞어 20m 정도 간격으로 하나씩 심은 후 20년이나 50년 지난 뒤의 그 풍경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100년 후의 모습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김봉규 문화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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