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2] 두 번째 작품 ‘혼가’ 그리고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조직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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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8   |  발행일 2019-08-28 제14면   |  수정 2019-08-28
‘혼가’ 흥행참패 딛고 1929년 프롤레타리아영화운동 단체 결성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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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고아읍 원호초등 뒤편에 위치한 김유영 감독의 작품 ‘유랑’ 스틸컷 조형물.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서울키노’로 새롭게 출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유영은 유랑 발표 이후 1년 만에 두번째 작품인 ‘혼가’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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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감독의 두 번째 작품 ‘혼가’의 제작 소식을 다룬 1928년 6월20일자 동아일보 기사. 혼가는 무산계급이었던 세 청년의 서러운 생활과 가열한 투쟁을 진지하게 담아낸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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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영화예술가동맹 창립 소식을 다룬 1929년 12월12일자 동아일보 기사.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은 김유영의 주도 하에 창립된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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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키노 창립을 다룬 1928년 5월31일자 중외일보 기사. 서울키노는 프롤레타리아영화 제작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겠다는 회원들의 의지로 탄생했다.

#1. 서울키노, 그리고 영화 ‘혼가’

1928년 5월31일, 중외일보에 묵직한 어조의 기사가 실렸다.

“유랑을 영화화하여 새 경향을 보여준 ‘조선영화예술협회’는 새로운 견지에서 파악을 가진 신진 영화 청년과 더불어 새로운 조직을 바탕으로 더한층 의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그 협회를 바꾸어 그 이름조차 새로운 기운을 가진 ‘서울키노(경성영화공장, 京城映畵工場)’라 하고….”

앞으로 프롤레타리아영화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겠다는 기존 ‘조선영화예술협회’ 회원들의 공표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유영이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구미 출신 김유영은 곧 두 번째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이미 나흘 전인 5월27일에 일간지를 통해 제작 개시를 알린 ‘혼가(昏街)’ 즉 ‘어둠의 거리’였다. 임화, 추용호, 이영희, 남궁운 등이 출연한 혼가는 폭염 속의 지방 촬영을 거쳐 6월 하순에 개봉했다.

프롤레타리아영화였던 만큼 혼가는 당시의 암울한 사회를 배경으로 무산계급인 세 청년의 서러운 생활과 가열한 투쟁을 진지하게 담았다. 구체적으로 해고된 노동자, 퇴학당한 고학생, 역마차 화부가 등장해 계급 간의 격렬한 대립, 식민지 조선 노동자 계급의 비극적 운명, 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 등을 그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도시와 농촌, 지주와 소작인, 자본가와 노동자, 그 사이의 갈등이 골자였다.

하지만 김유영에게는 두 번째 작품이자 서울키노로서는 첫 작품인 혼가는 흥행에 실패했다. 유랑보다 더 못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작품의 질적 문제였다기보다는 시대적 분위기가 그랬다. 당시 김유영과 같은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 출신 가운데 강호(姜湖)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가 영화제작사 ‘남향(南鄕)키네마’를 통해 열악한 농촌 환경을 그린 카프영화 ‘암로(暗路)’를 제작해 발표했는데, 그 또한 외면 받은 까닭이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2. 또 다른 조직,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서울키노의 탄생을 공표한 날로부터 약 1년 반이 지난 1929년 12월12일, 이번에는 동아일보에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침체 상태에 빠진 조선 영화계에서 영화에 대한 연구와 활동을 이어갈 신진 영화예술인들은 오래 전부터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영화인만의 조직체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숙제로 여겨왔다. 그러던 차 마침내 지난 9일에 효제동 이사칠(孝悌洞 二四七) 회관에서 그에 관한 제반 사항을 토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신흥 영화이론의 확립, 엄정한 영화 비판과 연구,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영화 제작 등을 목표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新興映畵藝術家同盟)’이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창립회는 14일 토요일 오후 7시30분에 동 회관에서 개최하며 발기인은 남궁운, 김형용, 윤효봉, 임화 그리고 김유영이다.”


임화·추용호·이영희 등 출연 ‘혼가’
노동자·고학생 등 세 청년 운명 그려
신흥영화예술가동맹 결성 종횡무진
중앙집행위원·촬영 감독 등 도맡아
기관지 창간·영화 합평회 개최 앞장
영화비평·촬영소순례기 신문게재도



한마디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은 김유영의 주도 하에 ‘프롤레타리아예술협회’에 속한 남자배우들이 뜻을 모아 창립한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단체였다. 구체적인 강령, 규약, 조직을 갖춘 정식 단체로 조직의 경우 서무·촬영·출판·연구, 이렇게 네 분야로 구분되었다. 조선의 전위적 영화인이라면 대다수가 이 동맹에 참여한 가운데 김유영은 중앙집행위원 및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촬영부의 감독도 함께 맡았다.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은 첫 활동의 목표로 ‘찬영회(讚映會)’를 겨눴다. 찬영회는 1929년에 각 신문사의 영화 담당 기자들이 모여 결성한 친목단체였다.

“조선 민족의 입이자 눈인 신문을 이용해 구미(歐美)영화의 편만 들고 조선영화는 짓밟는 반동단체입니다.”

“옳습니다. 영화계 소식이 신문에만 보도된다는 걸 빌미로 저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 내보냄으로써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영화제작자, 구미영화 상설상영관, 여배우를 상대로 대가성 향응을 요구하는 등 비리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에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은 창립 보름만인 12월30일에 영화인 망년회 자리를 기습해 찬영회 해체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찬영회는 굴복했고, 이듬해 1월1일에 해체 성명을 발표했다.

나아가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은 1930년 2월에 기관지 ‘영화가(映畵街)’를 창간한 데 이어, 남궁운을 평양에 파견하여 지부를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3월18일에는 영화 ‘꽃장사’와 ‘회심곡(悔心曲)’에 대한 합평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시도했다.

#3. 반성하고 변화하라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김유영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교토지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곳의 책임자는 ‘우에다 이사오’로 그는 ‘신흥영화사’를 맡고 있기도 했다. 우에다 이사오는 김유영으로부터 조선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근황에 대해 듣고 ‘조선의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곳에서 김유영은 ‘일본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교토지부’를 통해 교토에 자리하고 있던 ‘송죽(松竹) 키네마 촬영소’와 ‘일활(日活) 촬영소’ 등을 견학했다.

“촬영소의 조직과 체계, 영화제작 기술의 수준, 그 모든 것들이 경이롭구나. 우리 조선의 영화제작 여건이 얼마나 열악한지 새삼 알겠다.”

그렇다고 부끄러움과 부러움만 있던 건 아니었다. 김유영은 반성할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월에는 신흥영화사에서 열린 ‘신흥영화좌담회’에 참석했다. 영화 노동자들에 대한 영화사의 횡포와 중간 관리자들의 착취에 대한 고발, 검열제도에 대한 비판 등 참석자들의 뜨거운 논의를 묵묵히 경청하면서 김유영은 조선의 영화계를 되짚었다.

공부도 했다. 영화연출은 물론 시설과 기재, 운영 등 영화제작의 전반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익힌 것이다. 아울러 영화인들과의 교류도 폭넓게 이어갔다. 일본의 대표적인 경향파 감독인 ‘다사카 도모타카’와는 아주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경향파란 예술적 부문보다 계몽이나 이념에 목적을 둔 집단을 이르는 말로 ‘카프’가 대표적이었다.

두어 달 뒤 일본에서 돌아온 김유영은 관찰하고 고민하고 판단한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공개했다. 먼저 ‘영화비판 - <판도라의 상자>’와 푸로영화 ‘<무엇이 그 여자를 그렇게 만들었나> 보고서’를 1930년 3월28일부터 4월6일까지 조선일보에 총 8회에 걸쳐 게재했다. 이 글을 통해 김유영은 프롤레타리아영화로 알려진 ‘무엇이 그 여자를 그렇게 만들었나’를 일러 경향적, 프롤레타리아적 영화이기는 하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영화로 보기에는 표현 방법이 감성적이라고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어서 ‘촬영소순례기 - 일본의 할리우드, 경도(京都, 교토)의 송죽(松竹), 일활(日活), 마키노, 동아(東亞)를 방문하고’를 1930년 5월11일부터 27일까지 조선일보에 총 9회에 걸쳐 실었다. 이를 통해 조선과 일본의 영화 제작 여건을 비교하고 반성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카프에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해체를 권고해온 것이다. 당시 카프는 1930년 4월26일에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조직을 확대, 개편할 것을 결의한 터였다. 구체적으로 서기국과 기술부 신설이었다. 특히 기술부의 경우에는 변화의 폭이 컸다. 카프를 문학인 중심의 대중조직에서 전문예술인 조직으로 전환하기 위해 산하에 기존의 문학 부문 외에 영화·연극·미술·음악 부문 등을 두기로 한 것이다. 특히 영화 부문의 경우, 영화운동의 역량을 카프에 집약시키려면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흡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를 들은 김유영은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소명출판. 한국영화감독론, 김수남, 지식산업사. 향토작가연구; 김유영의 삶과 영화 세계, 이강언. 유실된 카프 영화의 상징; 김유영 론, 김종원. 카프 영화와 프로키노의 전개과정 비교연구, 이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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