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7] 덕천마을 송소고택·송정고택·초전댁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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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7   |  발행일 2019-08-27 제14면   |  수정 2020-03-18
1880년 만석꾼 심호택이 지은 송소고택, 존경받는 부잣집 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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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6칸에 좌우익사가 연결된 ‘ㄷ’자로 구성된 송소고택 안채는 사랑채와 더불어 ‘ㅁ’자 형태를 띤다. 조선시대 상류 가옥의 특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경북도 민속자료에서 국가 민속문화재 제250호로 승격됐다.

나지막한 산이 사방을 둘러싼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천이 흐르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논이 펼쳐져 있다. 근·현대의 집들은 대개 천변을 따라 자리한다. 낮은 산을 등지고 기와지붕을 인 집들이 동서로 길게 앉아 있고, 집들은 모두 남쪽을 바라본다. 천을 건너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다리는 셋, 덕천1교를 건너면 ‘청송심씨본향’이라 새겨진 바윗돌과 마주한다.

#1. 청송심씨 덕천마을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한다. 이후 심씨는 심홍부의 증손인 심덕부(沈德符)와 심원부(沈元符) 형제부터 크게 두 계보로 나뉜다.

형 심덕부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도움을 주었던 인물로 조선 개국 후 신왕조 건설에 일익을 담당하며 가문의 영달을 연 인물이다. 아우 심원부는 고려 말에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그는 아들들에게 ‘나라도 망하고 임금도 잃었으니 너희는 조상이 묻혀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시조선산(始祖先山)을 지키며 살아가라’는 유훈을 남겼다. 덕천리의 청송심씨는 대개 그의 후손들이다. 덕천마을에는 심원부의 위패를 모신 경의재(景義齋)와 함께 조선 후기 대부호였던 심부자의 송소고택이 자리하고, 찰방공종택, 송정고택, 창실고택, 요동재사, 소류정 등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고택이 많다. 이들 중 송소고택, 송정고택, 초전댁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 국가 민속문화재 제250호 송소고택

송소고택(松韶古宅)은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고종 17년인 1880년에 지은 집이다. 심호택은 조선 영조(英祖)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세손이다.

원래 심처대는 덕천리에서 분가해 파천면 지경리 호박골에 살았다. 선대의 유훈을 받들어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그는 가난했다. 어느 날 그는 길가에 쓰러져 있던 한 노스님을 정성을 다해 돌보았고 기력을 되찾은 스님은 그에게 묫자리 하나를 일러준다. 이후 고된 농사일에 병을 얻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스님이 알려준 묫자리에 아내를 묻었다. 그때부터 심처대의 집안에 부가 쌓이기 시작하여 만석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심호택, 국채보상운동·토지분배 솔선
송소고택 조선 상류가옥 특징 잘 간직
의친왕 편액 송정고택은 1914년 건립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도 종종 들러
1806년 지은 초전댁, 원래모습 그대로



후손 심호택 역시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당대 경상도의 만석꾼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호박골에 살다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거를 결심하면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13년간 수십 명의 인부가 집 앞에 움막을 짓고 먹고 자며 지은 99칸의 대규모 저택이 바로 송소고택이다. 완공 후 심호택은 저택에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을 달았다.

솟을대문이 우뚝하다. 좌우로 각 3칸의 행랑채와 우사 등이 연결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당 너머 왼쪽에 큰 사랑채가 위치하고 오른쪽에는 작은 사랑채가 자리하며 그 가운데에 중문이 나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작은사랑은 중문을 포함해 정면 6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랑 앞마당에는 대문을 중심으로 큰사랑마당과 작은사랑마당을 경계 짓는 헛담이 서있다. 대문을 들어설 때나 작은사랑에서 큰사랑채가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큰사랑마당에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고 전나무와 400년 되었다는 회양목 등이 살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에 좌우익사가 연결된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평면이 사랑채의 ‘ㅡ’자 평면과 합해져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를 이룬다. 안채 오른쪽에 있는 문을 나가면 초가지붕의 방앗간이 있다. 큰사랑마당 좌측에 난 협문으로 나가면 3칸 대문채를 따로 가진 별채가 있다. 별채는 정면 4칸에 우측 앞으로 누마루를 달아낸 ‘ㄱ’자형 건물이다.

심호택은 아침 일찍 뒷동산에 올라가 굴뚝에 연기가 나오지 않는 집에 양식을 보냈다고 전한다.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지역의 국채보상회장으로 적극적인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광복 이후 농지개혁이 일어나자 심호택의 아들 심상원과 그의 아들 심운섭은 당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소작농에게 분배함으로써 지역 최초로 자작농이 창설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로써 9대째 이어지던 ‘부자’의 이름은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송소고택은 존경받는 ‘부잣집’이다.

조선시대 상류 가옥의 특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송소고택은 1985년 경북도 민속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12일에 국가 민속문화재 제250호로 승격되었다. 현재 송소고택은 한옥 스테이 시설로 활용되고 있으며 사무실과 화장실, 세면장 등도 갖추고 있다. 2011년에는 체험형 숙박시설 부문 ‘한국 관광의 별’에 선정되기도 했다.

#3.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631호 송정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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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고택 왼쪽에 위치한 송정고택은 심호택의 둘째 아들이 살았던 집이다. 두 고택은 건축 평면 및 공간적 유사성을 보인다.

송소고택의 왼쪽에 위치한 송정고택은 심호택의 차남인 송정(松庭) 심상광(沈相光)의 살림집으로 1914년에 지어졌다. 참봉어른이라 불렸던 심상광은 학문에 뛰어났으며 안동 도산서원장, 안동 병산서원장, 청송향교 전교 등을 지낸 인물이다. 지금도 유생들이 매년 송정학계를 열고 있다고 한다.

송정고택의 대문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다. 가운데 솟을대문을 열고 좌측에 2칸, 우측에 1칸의 창고를 두었다. 대문 안은 너른 마당이다. 오른쪽으로는 송소고택과 이어지는 문이 있고 왼쪽으로는 우물과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다. 대문의 축선에서 좌측으로 약간 치우쳐 사랑채와 중문간채가 위치하며 오른쪽에 독립된 별채의 옆모습이 보인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측 1칸은 대청방이며 나머지 2칸은 온돌방으로 구성했으며 전면 반 칸은 툇마루를 설치했다. 툇마루의 측면에는 판문을 설치했는데 우측 판문 위에 의친왕의 글씨라는 오우당(五友堂)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집에는 독립 운동가 이범석 장군이 종종 찾아와 머물렀다고 전한다. 중문을 통과하면 작은 안마당 너머 약간 높직한 축대 위에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의 안채가 앉아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책방과 고방이 연결되어 있으며 고방 아래로 앉은뱅이 통로가 나 있다. 별채에는 온돌방과 입식부엌, 입식욕실이 설치되어 있고 그 뒤쪽에 근년에 지은 공용 화장실이 있다.

송정고택은 송소고택과 건축 평면 및 공간적 유사성을 보인다. 그로 인해 가계의 분파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통 건축의 형식적 전이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래 향촌사회 지배층의 생활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송정고택은 2015년 5월18일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63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한옥스테이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4.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21호 초전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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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 석촌공파 17세손인 심덕활이 셋째 아들의 네번째 돌을 기념해 지었다는 초전댁. 건축 당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초전댁(草田宅)은 순조(純祖) 때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청송심씨(靑松沈氏) 석촌공파(石村公派) 17세손인 심덕활(沈德活)이 1806년 무렵에 지은 것이다. 그는 셋째 아들 심헌문(沈憲文)을 요절한 아우 심덕종(沈德宗)의 양자로 보냈는데, 헌문의 네 번째 돌을 기념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21세손인 심의해(沈宜海)가 1900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초전댁은 ‘一’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정면의 사랑채는 중문간을 사이에 두고 우측에는 팔작지붕 건물인 큰 사랑채를 두었고, 좌측에는 3칸 규모의 작은사랑을 두었다.

큰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전면은 대청으로 열고 배면은 방으로 구성했다. 방의 정면에는 두 짝 미세기문과 두짝 여닫이문을 이중으로 설치했고 문 상부에 사각의 작은 광창을 내었다. 작은사랑은 가운데 1칸 온돌방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고방을, 오른편에는 외양간과 대문간을 연접시켰다. 온돌방과 고방은 쌍여닫이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다.

중문을 통과하면 사각의 안마당 너머 안채의 대청이 열린다. 대청은 2칸으로 배면은 판벽에 쌍여닫이 판문을 설치하였다. 대청의 왼편에는 안방, 오른편에는 건넌방을 두었다. 안방의 전면으로 부엌을 연결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고 건넌방의 전면에는 고방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했다. 전체적으로 담담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가진 집이다.

사랑채 앞으로 마당이 넓다. 건물의 남쪽과 동쪽에는 한식기와를 얹은 흙돌담을 두르고 서쪽과 배면은 경사지에 축대를 쌓아 경계를 표시했다. 건물 오른쪽에는 예부터 사용해오던 우물이 보존되어 있다. 초전댁은 처음 건축했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건물이라 하며 조선시대 경북도 북부 지방 양반 가옥의 구성 요소를 갖추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초전댁은 2002년 4월15일에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2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한옥 스테이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청송군지. 경상북도 문화재지정 조사보고서, 경상북도, 1985. 청송문화재대관, 청송군, 2016. 국가문화유산포탈.

공동기획지원 :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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