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통기타 가수 김지훈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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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3   |  발행일 2019-08-23 제41면   |  수정 2019-08-23
“한국의 사이먼가펑클 꿈꾼 대구 첫 포크듀엣, 격동의 시대 불운 가슴 한편 응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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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주진과 함께 대구의 첫 포크듀엣 ‘콩심는 아이들’의 멤버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김지훈. 그는 79년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 가수로 활동했지만 10·26과 12·12 사태 등으로 자신의 음악 홍보 기회가 박탈돼 팀은 해체되고 그 과정에 서울에 잔류, 이후 지금까지 유명 통기타 라이브 무대를 순회하는 포크뮤지션으로 살고 있다.

1975년 대구에서 주목받는 포크 듀엣이 탄생한다. 주진·김지훈이 결성한 ‘콩심는 아이들’이다. 리더 주진이 작사·작곡한 ‘여자의 행복이란’은 당시는 물론 지역 뮤지션이 대구에서 발표해 가장 히트된 곡이었다. 둘은 서울 오아시스레코드사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그렇게 상경한 김지훈은 서울 통기타라이브 문화의 변천상을 몸소 체험한다. 그런 그가 얼마전 대구로 귀향했다. 그는 2005년부터 한국도로공사와 손잡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자선 콘서트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앞서 한국어린이백혈병재단과 인연으로 환우돕기 거리음악회도 꾸준히 해왔다. 하지만 그의 가슴 한편에는 큰 응어리가 숨어 있다. 김정호·김종환·신계행·둘다섯·하사와 병장·소리새·해바라기…. 국내 여러 1급 포크가수와 동고동락한 사이지만 자신만은 무인도에 갇혀 사는 것 같아 속이 상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세상은 실력만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신대구부산고속도로 청도휴게소에서 통기타 무대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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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의 음반을 낸 김지훈은 한국도로공사와 손을 잡고 여러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자선음악회를 열고 있다. 최근 대구로 내려 온 그는 주말마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 청도휴게소에서 자선공연을 한다.

▶어떻게 노래를 시작하게 됐나.

“수성구 중동에서 태어났고 계성고를 졸업했다. 형이 가진 통기타를 매일 퉁겼다. 계명대 도서관학과에 입학했지만 공부보다 매일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의 벤치에 앉아 그냥 통기타 삼매경에 빠져 사는 걸 좋아했다.”

▶당시 대구의 대중음악적 지형도는 어땠는가.

“일단 김진규, 도병찬 투톱 DJ가 진을 친 한강 이남 두 번째 FM방송국인 한국FM방송(bbc)이 동성로 옛 런던제과 자리에 있었다. 그 방송은 우리의 우상이었다. 당시엔 통기타 가수는 잘 보기 힘들었다. 대신 DJ가 최고 스타였다. 김세라·김종철·유광성·배주희…, 참 그리운 DJ들이다. 당시 청춘은 기댈 데가 별로 없었다. 휴대폰도 게임방도 노래방도 없던 시절. 화원·동촌·청천·강정 유원지에 야외전축 들고 가서 신나게 고고파티를 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통기타를 나름 감각있게 친다는 건 또래들한테는 인기짱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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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첫 포크듀오 ‘콩심는 아이들’ 결성 시절의 주진과 김지훈(왼쪽).

▶‘콩심는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 결성하게 되는가.

“어느날 혼자 중앙공원에서 기타를 치고 놀고 있었다. 그 때 시내 놀러 나온 주진이 그 광경을 보고 다가와 금세 친해졌다. 주진은 화음을 넣어 줄 짝꿍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장성열·전철·김미영·강병성 등과 통기타 모임도 갖고 있었다.”

▶콘서트도 했는가.

“주진은 중구 삼덕동에서 기타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연습은 주로 그의 학원에서 했다. 당시는 콘서트보다 리사이틀이 보편적이었다. 첫 리사이틀은 한일극장 근처에 있던 교육회관이었다. 그 때 베사메무초 등 라틴뮤직에 꽂혀 있었다. 주활동 무대는 음악감상실이었다. 코리아, 녹향, 올림푸스, 나드리예, 그린길, 포크니, 해오라기 등을 전전했다. 당시 개런티는 7만원 정도였다. 이내 대구MBC 인기 음악 프로그램인 ‘토요일에 만납시다’에 고정출연을 했다. 이어 미스코리아대회에 초대를 받았다.”

▶당시 방송국의 음악 수준은 다운타운보다 한 수 아래였는데, 그래도 눈밝은 제작진이 있었던 모양이다.

“맞다. 김영일 PD와 죽이 맞았다. 그 덕분에 ‘여자의 행복이란’ 히트곡이 수록된 첫 앨범을 오아시스에서 낼 수 있었다. 우리 음반은 시내 웬만한 레코드가게에 다 깔렸고 특히 대구MBC에서 우릴 자주 노출시켰다. 그 때 내가 사용한 기타는 한일악기점에서 10만원 주고 구입한 야마하 FC-180이었다.”


공부보다 중앙공원서 통기타 삼매경
주진과 만나 ‘콩 심는 아이들’ 결성
음악감상실 활동·대구MBC 고정출연
주진이 만든 ‘여자의 행복이란’ 히트

서울의 레코드사서 러브콜 받고 상경
방송출연 앞두고 10·26 사태 등 악재
음악프로 올스톱…멤버와 결별수순

음악전 생계, 업소돌며 살인적 일정
가요는 촌스러워 자제…팝송이 주류
세계적 가수 배출 K-pop 격세지감

무대 독점한 술손님, 설자리도 위축
정규앨범 4장 발매…다양한 무대 공연
대구 포크문화 발전에 일조하고 싶어



▶둘의 서울 생활이 궁금하다.

“1979년 한진고속 그레이하운드(화장실이 있는 2층 고속버스)를 타고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했다. 우린 ‘한국의 사이먼가펑클’이 될 거라고 믿었다.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건너편에 있었다. 회사에서 하숙비 명목으로 50만원을 주었다. 우린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었다. 매일 출근을 해야만 했다. 그때만 해도 레코드사와 방송사 간에는 밀약관계를 맺고 있었다. 자신들이 미는 가수를 일정한 기간 집중적으로 노출시켜주는 것이다. 물론 맨입으로 안 된다. 일정한 광고비 명목의 홍보비는 기본. 그 때는 관행이었는데 나중에 이게 문제가 돼 한 번 파동을 겪게 된다. 대중가수의 성공은 자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물론 실력은 기본이겠지만.”

▶방송국 일은 잘 풀려나갔는가.

“우리 대표곡이 방송에 노출되려고 하던 찰나,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것이다. 10월26일. 음악 프로는 올스톱 된다. 악재가 연발한다. 12·12사태가 발생한다. 또 우리 음악이 묶이게 된다. 레코드사에서도 우리한테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존재감도 바닥이었다. 주진과 나는 자연스럽게 결별수순을 밟는다.”

▶이후 서울에 계속 있게 된 계기는.

“대구에서 활동하다가 서울로 간 포크듀엣 ‘하사와 병장’이 있는데, 70년대 후반 ‘목화밭’으로 공전의 히트를 거뒀다. 우리도 그들을 부러워 했다. 리더 이경우와 서울에서 만났는데, 그가 종로3가 화신극장 지하에 있던 호프레스토랑 ‘웨이브’를 소개해 줬다.”

▶정말 다양한 무대를 만났겠다.

“신촌 굴레방다리 근처 월세집에서 진을 쳤다. 차도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음악 이전에 ‘생계’가 우선. 명동, 종로, 신촌, 무교동, 을지로, 충무로, 청계천 등 서울의 1급 통기타 라이브는 거의 다 점 찍었다. 명동 ‘오라오라’, 청량리 ‘오계절’과 ‘아마존’, 김정호가 차린 ‘꽃잎’…. 오전 9시 집을 나오면 맨 먼저 꽃잎을 필두로 웨이브, 오후 6시에는 남영동, 이어 이태원으로 넘어가 패스포드 스탠드바, 양식당 까르로메, 어둑해지면 한남동 브릿지와 명동 오라오라, 밤 9시에는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에선 그룹사운드 조커스 멤버로 섰다. 그게 끝이 아니다. 새삼트리오, 라틴코리아나 등이 포진해 있는 롯데호텔 바비런던에서 일을 마친다. 자정 조금 못 미친 시각, 그제서야 업소 9곳이 다 끝난다.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장기 고정 출연한 업소도 많았겠다.

“신사동 ‘함부르크’는 13년, 압구정동 ‘마론 투’는 10년, 압구정동 ‘14세기’는 6년. 보통 1년 정도 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이 바닥 룰이다.”

▶업소에선 주로 어떤 노래를 했나.

“평균 30분 부른다. 업소는 자기 곡을 부르는 데가 아니라 손님 위주다. 침묵은 금물, 멘트도 분위기에 맞게 날려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팝송은 얼추 200여곡을 다 암보하고 있어야 한다. 닐 다이아몬드, 엘튼존, 사이먼가펑클, CCR, 밥딜런, 탐 존스, 윌리 넬슨, 닐 영 등을 좋아했다. 그 땐 스탠더드 팝이 주류를 이뤘다. 가끔 라틴뮤직도 건드렸는데 트리오 로스 판초스 곡도 잘 불렀다. 가요는 극도로 자제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의 이루어질수없는 사랑, 장현의 미련 등이 전부였다. 지금과 달리 그 때는 이상하게 팝이 있어 보였지, 가요는 좀 촌스러웠다. 이젠 K-pop의 정점 방탄소년단이 세상을 평정했으니 참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외국으로 진출한 적도 있는가.

“90년대 초 일본 도쿄 롯폰기 최고급 극장식 뮤직 레스토랑이었던 ‘노부가’ 초대로 3년쯤 일본에서 살았다. 대충 해선 망신만 당할 것 같았다. 관객 분석을 했다. 불후의 팝 명곡이 딱이라 여겼다. 앤디 윌리엄스, 페리코모 계열의 노래를 정중하고 격조있게 풀었더니 금세 반응이 왔다.”

▶90년대 대구 팔공산 라이브에도 잠시 섰다는 소문이 있더라.

“IMF 외환위기 직후 대구에도 통기타 라이브 붐이 일어났다. 그래서 ‘산과배’ 등 몇몇 업소에서 노래를 했다. 지금은 입적한 파계사 성전암 철웅 스님이 내 팬이었다. 자주 들러 이정옥의 ‘숨어 우는 바람소리’를 잘 신청했다.”

▶최강이었던 미사리 통기타 문화의 추락도 다 지켜봤겠다.

“유명세와 일확천금을 벌려는 업자들이 결국 미사리를 죽였다고 볼 수 있다. 1급 가수를 무대에 세우려면 최소 1억원 정도의 개런티를 줘야 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주인이 원하는 날, 그리고 정해진 횟수를 채워야 한다는 제약조건이다. 업주는 가수를 가능한 한 오래 활용하려고 한다. 월 1회 정도 찔끔찔끔 부른다. 나머지 날에는 가수는 없다. 그냥 현수막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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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훈 앨범

▶음반은 몇 장 냈는가.

“나는 그동안 4장의 정규앨범을 발매했다. 그중 사랑의 기도, 우리인생, 그대 생각하면서, 풀잎은 바람에 날리고 등이 조금 알려졌다. 덕분에 KBS열린음악회, 가요무대 등에 출연할 수 있었다.”

▶통기타로 밥 먹고살기 어떤가.

“설 무대가 없다. 대구도 살펴 보니 술손님이 무대를 독점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상당수 가수는 각종 축제 행사 등에 목맬 수밖에 없다. 나도 아직 음악 갖고 생계를 해결해야 된다.”

▶향후 하고 싶은 일은.

“당분간 대구의 포크문화 발전에 일조하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라디오 음악프로에도 출연해 그 시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만 아직 연락이 오는 데가 없다. 내가 덜 유명해서 그런가.”(웃음) 010-5233-9643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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