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보다 많은 대파, 따로국밥·육개장 절충 경산·청도·영천권 가마솥장터국밥 재현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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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3   |  발행일 2019-08-23 제34면   |  수정 2019-08-23
온천골가마솥국밥 박수근 사장
■ 따로국밥·육개장·해장국 대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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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여러 소고깃국의 한 특징이랄 수 있는 대파. 온천골가마솥장터국밥에서도 대파의 양이 무보다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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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되어가고 있던 경산·청도·영천권 가마솥장터국밥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경산시 계양동 온천골가마솥장터국밥 본점에서 박수근 사장은 국밥이 구원이라 여기며 매일 국을 직접 끓이고 정량에 맞게 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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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부터 끓이고 그 다음에 파를 섞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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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탕한 국이 80% 정도 비워지면 많이 익어버린 나머지 20%는 대기중인 초탕국과 섞어 손님상에 퍼준다. 그런 용도의 가마 솥이 나란히 앉아 있다.

1부 인생은 경북도청 공보실 보도계 7급 직원이었다. 그러다가 2부 인생을 소고깃국에 올인한 사내가 있다. 박수근(59). 훗날 대구식 장터국밥의 원형을 간직한 ‘온천골가마솥국밥’의 개발자가 되는 그는 정년을 18년 앞둔 1995년 말 사직서를 낸다. 현실의 무서움을 깡그리 무시한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전에는 지역 언론 기자와 한몸으로 붙어다녔다. 홍보자료를 만들어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게 주업무였다. 퇴임 직전 그는 치커리, 케일 등 수경재배의 성장잠재력을 빨리 간파하고 뛰어든다. 그때는 공무원 신분이라 조카 이름으로 경산 자인에서 ‘온천골 농원’을 경영했다. 하지만 수경재배 채소는 상추 등 일반 채소문화를 극복하지 못했다. 예상외로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진급도 더뎌 내친김에 새로운 삶을 살자며 사직서를 던진다.

공무원 접고 소고깃국 올인 2부 인생
경북 한우활성화 정책, 관련사업 시작
온천 산재한 경산, 온천골갈빗집 간판
숯불갈빗집 경쟁 심화, 잘나가다 도태

남산·자인지역 장터국밥 전설 노부부
딸 황군자 할매 레시피 소고깃국 터닝
국밥집 입소문…13개 가맹점 넓혀가

온천골 국밥
가야산 지하 암반수 직접 갖고와 사용
양지·사태·앞다릿살·목살 4종류 혼용
고기 24㎏ 300인분 가마솥 6개 사용
대파6 무4 비율, 고추기름 별도 조미
80%익힌 초탕, 많이 익은 국과 혼합
잘 끓이는 것만큼 잘 담는데도 혼신


◆대구식 장터 소고깃국밥의 출발…온천골

당시 경북도는 한우 활성화 사업에 매진한다. 한우 판매점을 여는 사업자에게 5년 거치 15년 상환으로 5% 이자로 2억원을 융자해 주었다. ‘기회다’ 싶어 퇴직금에 융자금을 합쳐 한우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경산시 남산면사무소 근처 과수원 부지에 2층 건물을 신축하고 숯불갈비점을 오픈한다. 당시 경산 자인~남산권에는 남산식육식당, 대천숯불황우촌, 새시장식육점 등이 미식가 단골을 확보하고 있었다. 거기에 온천골까지 가세해 경산은 대추, 염소와 함께 숯불갈비벨트로 급부상한다. 금상첨화, 자인에 한우단지까지 생긴다.

상호가 마땅찮았다. 당시 경북도 특작계장이 ‘온천골’을 추천한다. 경산에는 석정·상대온천, 인근 청도에는 용암·학일온천이 있었다. 온천이 적잖게 산재해 있으니 온천골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온천골갈빗집이 탄생한다. 매머드 규모였다. 직원만 28명. 온천골은 남산식육식당과 함께 경산의 대표적 숯불갈빗집으로 출발한다.

하면 제대로 하자 싶었다. 일본 오사카로 가서 소를 해체하는 방법(사바키)을 전문 기술학교에 가서 배웠다. 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B급인 부위도 A급으로 살려낼 수 있었다. 숯불구이용 한우도 결국 잘 비육시키는 것 이상으로 잘 숙성시켜 최고의 석쇠 숯불 위에서 잘 구워야 제맛을 낼 수 있다는 걸 절감한다.

처음에는 문전성시였다. 하지만 비싸디 비싼 한우. 소 한 마리를 잡으면 3분의 1은 구이용, 나머지는 국거리용으로 전락했다. 앞으로는 남는 것 같은데 뒤로는 늘 밑졌다.

늘 국거리용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하급 고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했다. 모든 사업자에게 저승사자로 등장한 IMF 외환위기. 그도 피해나갈 수 없었다. 평소 식당은 돈을 아끼지 않는 아베크족, 골프족, 미식가들로 북적댔다. 그런데 그 인파가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90년대 후반 대구 도심에도 괜찮은 숯불갈빗집이 많이 들어서게 된다. 그들까지 라이벌로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수성구 만촌동에 있었던 ‘비원’이다. 비원은 등심 위주였던 대구에 ‘갈빗살 특수’를 퍼트린다. 온천골이 휘청댄다. 밀린 원금은 몇 달 안 돼 두 배로 불어났다. 버틸 수 없었다. 가용 부동산을 다 처분해도 모자랐다. 믿었던 친구에게 돈 얘기를 했지만 다들 냉담했다. 아이들 생각을 못했다면 그도 이승의 몸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장터국밥이 대세

그때 운명처럼 다가선 음식이 있었다. 의식 속에 가물거리던 바로 그 소고깃국이다. 그는 그 음식이 ‘장터국밥’이라는 걸 훗날 알게 된다. 일단 누나와 상의했다. 누나는 극구 반대였다. 고기도 남기는 세상인데 허접스러운 국밥이 먹혀들까. 사업성이 없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물러서지 않았다. 순간 경산 남산·자인 지역에선 ‘장터국밥의 전설’로 불리는 황군자 할매의 부모가 생각났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는 염소를 잘 잡았다. 잔치, 운동회, 상가 등 길흉사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국을 끓여주었다. 대구의 따로국밥과 육개장, 심지어 해장국도 아니었다.

그가 다닌 경산 남산초등 운동회날이면 부부는 아침 일찍 운동장 한편에 가마솥을 걸었다. 바람에 실려온 국끓는 냄새, 찬반 위에 고명처럼 올려주는 뜨끈한 국. 쪼그려 앉아 허기를 면했다. 이후 부부의 국 기술은 사장된 상태였다. 그는 노부부의 국을 부활시키고 싶었다. 부모가 국을 잘 끓였으니 그 딸(황군자)도 당연히 잘 끓일 것이라 여겼다. 수소문을 했지만 고향에는 없었다. 남편과 그닥 사이가 좋지 못해 가출해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경남 마산에 있는 그의 친구 집에 의탁하고 있다는 걸 알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청도 소싸움장의 장터국밥

그때 청도소싸움이 정례화되고 있었다. 그도 소싸움장 한편에 있는 푸드코트에 입점하고 싶었다. 하지만 청도군민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경북도에 부탁했다. 어렵사리 개선문 옆 사과밭을 임차해 국밥집을 차렸다. 마산의 한 뷔페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할매는 경산으로 오지 않으려 했다. 5일만 끓여주면 한달치 월급을 주겠다고 설득해 모시고 왔다.

일단 가마솥을 구입했다. 바로 사용할 순 없었다. 가마솥을 길들이는 것은 국을 제대로 끓이기 위한 필수과제. 할매도 부모의 국솜씨를 몸 안에 갖고 있었다. 할매의 장터국밥은 단번에 입소문이 난다.

기존 온천골갈빗집은 4년 정도 버티다가 문을 닫는다. 1999년 다시 온천골국밥집으로 변신한다. 할매와의 인연은 딱 7년이었다. 이후로는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일할 수 없었다. 할매는 지금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는 눈대중 손대중식으로 갈무리되던 장터국밥을 할매로부터 전수하고 이후 표준레시피를 구축한다.

개업날, 하루 200그릇만 팔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대박이었다. 하루 800명이 몰렸다. 한 그릇 3천500원. 지금은 9천원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맘을 먹는다. 늘 짐차를 몰고다녔다. 그는 이미 바닥을 친 몸이었다. 지금도 종일 식당을 지킨다. 직접 국을 끓이고 그리고 직접 국을 정량대로 퍼담는 일도 도와준다. 고기는 딱 8점, 정말 큼지막하다. 파와 무, 그리고 국물의 양, 마지막에 편구름처럼 둥실 떠오르는 벌건 고추기름 양까지도 비율을 정확하게 지켜 담는다. 어느 하나가 부족해도 많아도 맛이 감해진다. 틈만 나면 홀 직원에게 당부한다. 절대 국그릇을 흔들지 마라, 그럼 위로 올린 고기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결국 국이 황량해 보인다. 식감을 낮춘다. 국그릇은 아무나 못 만진다. 담당 이모한테만 맡긴다.

“잘 끓이는 것만큼 잘 담아줘야 한다. 온천골 국의 완성은 부엌이 아니라 국그릇이죠.”

모르긴 해도 초심을 잃지 않는 국밥장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기술은 2005년 누나에게로 넘어가 ‘성암골가마솥국밥’이 된다. 현재 그 업소는 장남이 맡아 가업을 잇고 있다. 온천골은 이후 화원, 칠곡, 반야월, 구미, 김천, 부산 해운대, 경기도 등 모두 13개의 가맹점을 갖게 된다.

◆온천골국밥의 맛 대해부

일단 상수도를 사용하지 않는다.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가야산 줄기 지하 암반수를 3일마다 한번씩 퍼온다. 처음에는 매일 한 말들이 생수통 60개, 지금은 3일마다 80통을 직접 갖고 온다. 오전 7시30분 국 끓이기 개시. 연료는 동절기에는 장작, 하절기(5월 말~9월 중순)는 가스를 사용한다. 현재 300인분 가마솥을 6개 사용한다. 반드시 초탕 때 80%쯤 익힌다. 그 국을 지하수로 식힌 뒤 냉장고에 보관해 둔다.

고기 배율을 잘 한다. 양지만으론 맛이 부족하다. 사태살만 사용해도 곤란하다. 모두 4종류(양지·사태·앞다릿살·목살)를 혼용한다. 정육과 힘줄, 지방 부위가 황금비율을 이루도록 썰어내야 한다. 고기 절단 절차도 전문분야다. 국맛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부위는 양지다.

300인분을 끓이려면 고기는 모두 24㎏을 사용한다. 그리고 대파와 무는 6대 4 비율로 사용한다. 무는 시원한 맛, 대파는 단맛을 담당한다. 그리고 시원하고 달큰한 맛이 나려면 추가로 두 가지 재료가 더 들어가야 된다. 고춧가루와 콩팥기름이 만나 형성되는 환상의 ‘고추기름’을 별도로 조미해 마련해둬야 한다. 이게 특제소스인 셈. 7일마다 한번씩 장만한다.

국이 끓을 때 고춧가루를 집어넣으면 국이 지저분해지고 텁텁해진다. 가맹점은 본점에서 굳혀 팩에 넣어놓은 고체형 고추기름을 받아 사용해야 된다.

동구 반야월 된장마을에서 주문해 만든 조선간장과 고춧가루만 사용해 고기를 잘 익힌다. 고춧가루와 간장이 스며든 고기에 물을 부어 기본 육수를 추출한다. 이 육수와 생수를 잘 넣고 빼면서 최고의 균형점을 잡아가는 게 국끓이기 테크닉. 부족해도 많아도 안 된다. 이 절차는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다.

자기 역할을 다한 고춧가루는 되레 방해꾼이 된다. 매운 기운만 빼내고 거름망을 사용해 모두 걷어내 버린다. 딱딱한 무부터 넣고 나중에 연한 대파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고추기름 소스를 푼다. 고추기름이 대파에 잘 스며들도록 주걱으로 잘 저어줘야 한다. 대파 관리도 쉽지 않다. 습기를 흡수하는 게 있고 뱉어내는 게 있다. 물기를 뱉어내는 물파를 사용하면 국물의 양이 불어난다. 그럼 국물을 덜어내줘야 한다. 정확한 국물양을 잡기 위해 칸을 새겨놓은 빨대(스트롱) 굵기 정도의 나무막대를 사용한다. 꼭 염도측정기 같다. 그 막대는 그가 어떤 근성을 갖고 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보통 소고깃국은 하절기엔 맛이 동절기보다 덜 하다. 하지만 2005년부터 제주무가 하절기에도 공급된다. 이젠 자유롭게 사철 식재료 유통이 괜찮아져 국을 맘껏 끓일 수 있게 됐다. 대파의 경우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다끼파를 알아줬지만 지금은 경산 임당뜰 대파도 유명하다. 그는 임당파를 사용한다.

온천골은 끓이는 예술 못지않게 담는 것도 예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홀 옆에 국을 떠주는 별도 공간이 있다. 그는 많이 익은 국을 초탕해놓은 국과 잘 혼합해 담는다. 손님은 그래서 식재료의 다양한 식감을 맛볼 수 있다. 너무 풋내가 나도 너무 짓물러도 맛이 아니다. 퍼내는 동안 남은 국은 짓무르고 그걸 아직 재탕하지 않아 힘찬 초탕 국과 섞어주는 것이다.

온천골의 국 끓이는 과정이 하나의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안목이 없는 사람은 가르쳐 줘도 제대로 끓이지 못하는 게 소고깃국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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