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4> 영양읍 대천리 문월당과 삼구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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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8   |  발행일 2019-08-08 제13면   |  수정 2021-06-21 17:52
왜란·호란에 맞서 싸운 오극성·오흡 父子 호국의 얼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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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성의 장남인 오흡이 세상과 연을 끊은 뒤 대천2리에 은거하며 지은 삼구정. 정자 앞 거북이 엎드린 것 같은 바위 세 개가 있다고 해서 삼구정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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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1리의 중심마을인 한내에 위치한 문월당은 화재로 소실됐다가 1969년 주손인 오창목의 주도로 중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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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깊이가 짙게 느껴지는 삼구정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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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월당 현판.

 

꽤나 들이 너른 마을이다. 동리 앞으로 큰 내가 흐른다 하여 한내(大川)라 이름 했다는데, 마을에서 큰 물길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너른 들 너머에 낮게 누워서인가, 무성히 자란 풀로 제 모습을 감춘 탓인가. 움직임을 감추고 파동을 일으키는 이 땅은, 옛날 누군가에게는 돌아가 고요히 쉬는 곳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더욱 침잠하여 은둔하는 곳이었다.

#1. 대천의 오극성과 오흡

마을을 개척한 사람은 함양오씨(咸陽吳氏) 용계(龍溪) 오흡(吳)이라 한다. 조선 인조 때다. 그가 마을을 연 이후 10년간 가뭄이 계속되었고 천은 말라버렸다고 한다. 인조조의 가뭄이 비단 한내만의 불행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마을은 한내(旱川)라 불렸다. 말라버린 천, 그것은 통탄을 내리덮는 천연한 이름이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한내와 인근의 고월, 옥산 등과 같은 동네를 합해 대천(大川)이라 하였다. 마을의 북쪽에는 반변천이 흐르고 마을을 관통하여 동천(東川)이 흐르니 대천이라는 이름이 지나친 것은 아니다. 기록에는 오흡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나 그의 아버지 오극성(吳克成) 역시 대천리 사람이다.


1594년 ‘권무과’에 급제한 오극성
이순신 휘하서 노량해전 승리 기여
매관매직 실망해 귀향 문월당 세워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 건물
화재로 소실된 후 1969년 다시 건립

오흡은 간재 이덕홍 문하서 학문 익혀
광해군때 ‘폐모론’ 이이첨 참수 상소
병자호란 항복하자 세상과 인연 단절
고향땅에 정자짓고 삼구정이라 불러



오극성은 명종 14년인 1559년 영양읍 대천2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다. 아버지는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지낸 경암(敬庵) 오민수(吳敏壽)로 청계(靑溪) 김진(金璡)과 함께 지역 최초의 교육기관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설한 선비였다. 오극성은 천성이 영민하고 조용히 학문을 닦는 가운데 몸을 돌보기 위해 틈틈이 무예를 익혔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34세였다. 아버지의 병환과 자신의 신병으로 인해 전장으로 나갈 수 없었던 그는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報倭寇)’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어두고 늘 바라보며 병법을 익히고 몸을 단련시켰다 한다.

2년 후인 1594년, 권무과(勸武科)에 응시하여 급제한 그는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왕을 호위하는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진하여 최대 격전지의 전투 상황을 직접 살피기도 했는데, 왕이 그를 평하기를 ‘이 사람 참으로 충신이다’라고 하였다. 곧 이어 그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제수되었고 1596년에는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올랐다. 그는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1598년에는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후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과 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역임하고 1602년에는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시독관(侍讀官)이 되었다. 무과 출신으로 시독관에 임명된 예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즈음 한 고위 관리가 더 높은 벼슬을 제안하며 그의 말을 탐냈다고 한다. 오극성은 ‘국가의 관직이 그렇게 사고파는 자리란 말이오?’ 하며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흡은 오극성의 장남이다. 그는 선조 9년인 1576년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재략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성품이 굳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광해군 때는 이이첨이 폐모론을 주장하며 인목대비를 유폐한 데 분개하여 그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고 전한다. 인조가 1639년에 그의 절행을 가상히 여겨 승훈랑 호조좌랑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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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인 오극성 고택. 1760년경 현손인 오학지(吳學智)가 개수한 뒤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2. 문월당과 오극성 고택 

 

현재 대천1리 황골(篁谷)에 오극성 고택이 있고 대천1리의 중심마을인 한내(또는 대천)에 그의 정자인 문월당이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극성이 정자를 짓고 문월당이라 편액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영양군지에 따르면 고향에는 이미 제택과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화재로 모두 불타버리자 그는 영양 서부리로 이사했고, 다시 수비면으로 이사했다고 전한다. 문월당은 오래 중건되지 못하다가 1969년에 주손인 오창목(吳昌穆)이 주도하여 다시 세웠다. 고택은 1760년경 현손인 오학지(吳學智)가 개수하였고 이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고택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정면에서 보면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방과 마루로 이루어진 사랑공간이 있고 우측에 방과 부엌, 고방이 있는데 마루와 고방이 각각 1칸씩 돌출된 양날개집 모양을 하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사각의 마당 너머 2칸의 커다란 대청이 열려 있고 그 좌우에 방이 있다. 방은 고방과 부엌에 연접되어 전체적으로 닫힌 공간을 이룬다. 현재 오극성 고택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문월당은 원래 대천2리 옥선대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한내마을의 북동쪽 모서리에 자리한다. 가파른 비탈면에 기대있어 정면과 측면에만 담장을 두르고 오른쪽 측면에 2칸 규모의 대문을 내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측으로 2개의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한 칸 대청을 열었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다. 온돌방 상부에 유리창을 내었는데 근대적인 실용성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오극성의 호 ‘문월’은 이백의 시 ‘술잔을 잡고 달에 묻는다(把酒問月)’에서 취한 것이다. 그가 남긴 시 ‘제문월당(題問月堂)’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옛날의 달은 지금의 달과 같은데/ 지금 시절은 옛 시절 아니구나/ 술잔을 멈추고 기다린 지 오래인데/ 봉우리에 솟는 일 어찌 그리 늦나.’ 이에 대해 ‘문월당중건기’를 쓴 류동수(柳東銖)는 이렇게 이해한다. ‘후대를 기다리겠다는 뜻일 것이다.’

오극성은 선조 38년인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서훈되었고, 광해군 9년인 1617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그는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내 평생 나라에 보답하기를 다하였으나 죽어도 오히려 한이 남는다. 너희는 부지런히 배우고 입신양명하여 임금 섬기기를 아비 섬기듯 하면 아비의 뜻을 체득한 효도가 아니겠느냐.’

#3. 용계 오흡의 정자, 삼구정

오극성의 장자인 오흡이 세상과의 연을 끊고 은거한 곳은 대천2리 옥산이다. 아버지의 정자 문월당이 있었다는 옥선대와 멀지 않은 자리다. 처음에는 대천리 반월산(半月山) 아래 초가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후 화재로 정자가 소실되자 맞은편 강둑으로 옮겨 모옥(茅屋)을 세웠는데, 정자 앞에 거북이 엎드린 것 같은 바위 세 개가 있다고 해서 삼구정(三龜亭)이라 했다. 현재의 모습은 후손들이 고쳐 지은 것이며 정자를 고치면서 터를 돋우는 바람에 거북바위는 땅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삼구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에 툇마루를 두고, 가운데 대청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다. 정면의 툇마루는 정면 기둥 밖으로 마루 끝을 확장한 후 풍혈을 낸 평난간을 둘렀다. 좌우측면의 툇마루 칸에도 쪽마루를 냈는데 벽을 세우고 판문을 달아 비교적 닫힌 구조를 하고 있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정면에 네 짝 여닫이 들문을 달아 마루의 확장성을 꾀했으며 배면에도 판문이 달려 있다. 좌우 온돌방은 마루 쪽에 두 짝 만살문을 두 칸 모두에 달아 놓았으며, 측면에는 여닫이문을 내어 외부와 통하도록 했고 배면에는 작은 벼락닫이 창을 내었다. 툇마루 쪽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는데 기둥머리에 새 날개 모양의 익공(翼工)을 짜 맞춰 품격을 높였다.

오흡은 정자 옆에 사명대(思明臺)라는 대를 축조하고 송죽매(松竹梅)를 가꾸면서 절의를 세웠다고 한다. 거북바위도 사명대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정자 뒤편에 뾰족이 솟아있는 기이한 바위 하나가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현현(顯現)처럼 느껴진다. 삼구정은 영양군 내에서 가장 오래된 누정으로 경북도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흡은 1641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 평상시 두건과 백성의 거친 의복만을 입었으니 죽은 뒤에는 명정에 처사(處士)라고 쓰도록 하라’였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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