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시선] 숲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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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13   |  발행일 2019-06-13 제30면   |  수정 2019-06-13
모험과 극복의 공간인 숲은
회복의 공간 역할까지 해내
자기 상실시대 자신을 보고
나다움을 회복하게 하려면
아이들에 숲의 시간을 주자
[목요시선] 숲의 시간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봄 시즌 공연과 몇 개의 일정을 마치고 강원도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10년 가까이 봉사해 온 소년의 집(가칭) 아이들과 함께였다. 단원들은 나와 함께 매년 소년원을 출소했거나 보호관찰처분을 받은 소년들이 자립을 위해 공동생활을 하는 이 기관 입소생들의 체험여행에 동참한다. 갯벌에서 뒹굴고 숲속을 헤매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 개성을 파악한 후에도 문학, 음악, 미술, 사진 등 예술교육과 개별 인터뷰를 지속적으로 진행한다. 이들의 사연을 뮤지컬로 공연하는데, 이 과정에 수년간 참여한 아이들은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진학도 하고, 취업도 하는 놀라운 변화의 주인공이 된다.

올해 여행의 첫 방문지는 인제 자작나무 숲이었다.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나무 둥치들이 하늘을 향해 힘껏 뻗은 숲에서 아이들은 지지배배 실없는 잡담을 하다 길이 가파르고 숲이 깊어질수록 점차 말이 없어진다. 그러다 내게 말을 건다. “저는요, 시시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들에게 공감해주면 아이들은 헝클어진 감정의 실타래를 찬찬히 살피게 되고, 스스로 떨치고 싶고 잊고 싶은 어두운 기억들을 소환해 맑은 바람에 말린다. 숲을 헤치고 나오면 아이들의 얼굴은 맑아지고 가슴에는 용기가 차오르며 팔다리에는 힘이 오른다.

숲은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매력적인 소재다. 최근 크로스오버 그룹 포레스텔라가 ‘미스띠끄(Mystique)’라는 앨범을 출시했는데, 그 제목을 보고 참 영리하다 싶었다. 숲은 미지의 세계라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포레스텔라는 숲에 뜬 별이란 뜻의 그룹명에 걸맞게 앨범 타이틀을 숲의 속성인 ‘미스띠끄’라 붙이고, 환상적인 화음으로 신비로운 마법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런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는 숲은 매력적인 만큼 위험하다. 하지만 검은 혼돈과 위험의 시간을 견딘 후에 오는 극한 카타르시스의 중독성은 강력하다. 숲의 시간을 극복한 사람은 포레스텔라가 커버한 “The Sky, the Dawn and the Sun”의 가사처럼 “나는 하늘이며 새벽이며 태양”이라고 외칠 수 있다.

결국 숲은 모험과 극복의 공간이다. 여러 문화권에서 통과의례의 성소로 사용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소년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밤중에 숲으로 보냈다. 어둠과 추위와 공포, 그리고 맹수와 독충의 위험을 이기고 돌아오면 비로소 마을의 전사(戰士)로 인정을 해주었다. 북미 원주민들은 소년들을 깊은 숲으로 혼자 들여보내 일주일 동안 음식도 먹지 말고 인생의 지표와 비전을 탐색하게 하고, 이 영적 여행에서 돌아올 때 비로소 어른으로 대해주었다.

숲은 회복의 공간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 ‘한여름 밤의 꿈’은 허미아와 라이샌더가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하는 딸을 사형에 처하는 아테네의 법률을 피해 숲으로 도망을 치면서 시작된다. 허미아를 사랑하는 드미트리어스와 그를 짝사랑하는 헬레나가 숲으로 따라 들어가면서 상황이 꼬이고, 숲의 요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 그리고 직조공 보텀의 사랑까지 엉키면서 사랑의 난리법석이 유쾌하게 전개된다. 난폭한 숲의 시간을 겪은 젊은이들은 자신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분별하게 되고, 아테네의 공작은 이 연인들의 결혼을 허락함으로써 본성을 거스른 부자연스러운 법률 대신 진정한 사랑과 인간의 본성이라는 숲의 질서를 법으로 세운다.

꿈꾸는 여유조차 빼앗겨 버린 자기 상실의 시대에 숲은 자기를 돌이켜 보고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아이들에게 숲의 시간을 견디도록 하자. 어둡고 난폭하고 위험한 여행에서 돌아오도록 기다려주자. 거친 호흡이 잦아들면 아이들은 절로 영혼을 헹구고 정신을 세우며 나다움을 회복한다. 별의 노래는 숲의 시간을 겪고야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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