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청도 신지리 선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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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6   |  발행일 2019-04-26 제36면   |  수정 2019-04-26
수백년 묵은 배롱나무 가지 너머 맑은 안색의 얼굴

청도읍내 지나 운문 가는 20번 도로에 오르자 어후, 어후, 숨이 저절로 소리를 낸다. 청도는 지금 복사꽃 천지다. 평밭에도 비탈밭에도 죄다 복사꽃이다. 그 해사한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조잘거리는 통에 혼이 쏙 나간다. 부러 곰티재 옛길로 날아올라 그 얼굴들 떨구어 보지만, 재 넘으면 벌써 거기에 가 있다. 동창천이 고요를 호령할 무렵 그제야 꽃들은 한발 한발 물러선다. 꽃들이 물러난 천변에는 엄숙한 얼굴의 서원마을이 있다.

평밭에도, 비탈밭에도 복사꽃 천지
잘 다려진 수수한 도포자락 같은 고택
동창천변 소요당 짓고 정착한 박하담
아름다운‘만화정’문 밖은 버드나무 뜰

살림집과 절충해 서원보다 별서 느낌
서원 철폐령 이후 1878년 후손이 중창
용머리 바위 아래 물굽이 이룬 용두소
동창천 가로지르는 묵직한 징검다리
가뭄·기근 대비 만든 곡식창고 ‘동창’


◆신지리

두 그루 플라타너스가 뒤집어진 우산 모양새로 하늘을 담고 있는 선호슈퍼 앞에서 우회전을 한다. 청도에서 고택이 가장 많다는 신지리(薪旨里). 길 양쪽으로 운강고택, 선암고택, 운남고택, 도일고택, 명중고택 등이 이어진다. 풍모는 당당하고 깨끗하다. 고졸한 멋은 적지만 잘 다려진 수수한 도포자락과 같은 담백한 맛이 있다. 신지리는 1520년에 밀양 사람인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이 들어와 정착했다. 중종 때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여러 번 실패했던 그는 동창천변에 소요당을 짓고 평생 은거했다고 한다. ‘하늘을 위로 하고 못을 아래로 하여 여기에서 소요하고, 고금을 포섭하여 여기에서 소요하여 자적(自適)의 즐거움을 깃들이니, 마침내 집의 이름을 소요(逍遙)라고 하였다.’

박하담은 훗날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이웃 마을에 살았던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와 우정을 나누었고 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후 마을의 역사는 그의 후손들이 이어나갔다. 여든여덟 칸이라는 운강고택(雲岡故宅)은 박하담의 서당 자리에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이 1824년에 중건한 집이다. 대문이 열려 있으나 텅 빈 마당이 칼날처럼 서늘해 쉬이 발 들여놓지 못하겠다. 금천교 천변에는 운강이 철종 7년에 세운 아름다운 만화정(萬和亭)이 있다. 정자 문 밖은 버드나무 뜰이다. 임진왜란 때 밀양박씨 14의사(義士)가 이 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부자, 형제, 사촌이었던 사람들. 그들 중 천성만호(天城萬戶) 박경선(朴慶宣)은 전투 중 한쪽 팔목이 잘려나가자 적장을 끌어안고 어성산의 절벽인 봉황애에서 동창천으로 몸을 던졌다.

◆선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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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서당 현판이 걸려 있는 선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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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뫼에서 바라본 선암서원과 용두소. 서원은 숲에 숨었다.


신지1리 마을회관 지나 오른쪽 고샅길로 들면 근래에 조성된 신지공원이 자리한다. 금낭화 자줏빛이 활활 타오르는 공원에는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곰방대가 서있다. 옛날 이곳에는 세라믹 공장이 있었는데, 그 때 사용되었던 굴뚝을 곰방대로 변신시켜 놓았단다. 피식 웃게 되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공원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선암서원(仙巖書院)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암서원은 박하담과 김대유를 배향한다. 잠긴 대문의 틈으로 속을 들여다본다. 장독대와 절구가 보인다. 안내에 따르면 선암서원은 안채,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 행랑채, 선암서당(仙巖書堂), 장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집과 절충식으로 지어져 서원이라기보다는 별서의 느낌을 준다.

동창천과 마주한 담장을 따라 장쾌한 소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이 흐른다. 서원 밖 천변 일대를 ‘소요대’라고 부른다. ‘소요당이 소요하던 대’라는 뜻 일게다. 담벼락 가운데 천으로 통하는 사주문이 나있다. 담장의 아랫단에 올라서서 발꿈치를 힘껏 들어본다.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훌쩍 카메라만 들이밀어 서원의 얼굴을 찾아낸다. 수 백 년 묵은 배롱나무 가지 너머 ‘선암서당’ 현판이 걸린 5칸 건물의 안색이 맑다. 서원은 원래 1568년에 매전면(梅田面)에 향현사(鄕賢祠)로 창건되었다가 1577년에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878년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쳤다고 한다.

사주문에서 내려선 물가에는 용두소(龍頭沼)가 있다. 용머리 모양의 바위 아래 물굽이를 이룬 곳이다. 용두소는 선호(仙湖)라고도 한다. 선호는 소(沼)의 이름이고, 신지1리의 부락 이름이기도 하고, 마을 슈퍼의 간판이기도 하다. ‘선인(仙人)이 우유(優遊)할 만한 곳’이라고 한다. 용두소 건너편으로 ‘뚝뫼’라 불리는 봉긋한 언덕의 솔숲이 보인다. 서원의 뒤로 돌아들면 1974년에 건립된 ‘임란창의의사전적비’가 있다. 전적비 뒤쪽으로 우뚝한 것이 어성산의 봉황애라 한다.

◆동창천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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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천을 가로지르는 묵직한 징검다리. 다리 건너는 민병도 갤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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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정. 박하담의 12세손 운강 박시묵이 1856년에 건립하여 강론하던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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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정. 박하담의 12세손 운강 박시묵이 1856년에 건립하여 강론하던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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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호슈퍼. 플라타너스는 1994년에 심은 것이라 한다.


서원의 뒷길로 빠져나가면 천변의 작은 들이 펼쳐진다. 들의 모서리에 민병도 화백의 미술관인 ‘목언예원’이 자리한다. 시조시인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민병도의 작업실이자 갤러리다. 그 앞으로 묵직한 징검다리가 동창천을 건넌다. 1520년 김대유와 박하담은 고향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창고를 짓고 곡식을 모았다. 가뭄과 기근이 들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창고의 이름은 동창(東倉), 고향의 강은 동창천이 되었다. 사화의 시대에 이 천은 사흘 동안 핏빛으로 물들어 거꾸로 흘렀다고 했다. 지금 동창천은 바닥이 고스란히 보이는 물 맑은 천이다.

천 건너 둑방길 따라 시원한 뚝뫼를 가로지른다. 천 너머 선암서원은 숲속에 숨었고 곰방대는 우뚝하다. 둑 아래 낮은 복사꽃밭을 지나 금천교에 닿는다. 금천교 건너 금천 초등학교 뒤로 데크 산책로가 이어지고 신지공원을 거쳐 다시 선암서원에 닿는다. 갑자기 학교 아이들 소리가 조잘조잘 들려온다. 좀처럼 듣기 어려운 소리,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소리, 동창천을 뒤덮는 소리. 혼이 쏙 나간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대구부산 고속도로 청도IC에서 내려 운문, 경주 방향 20번 국도를 타고 계속 간다. 금천면 소재지 초입인 동곡네거리에서 우회전, 금천네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해 금천교를 건너면 신지리다. 금천교 다리 옆에 만화정이 있고 선호슈퍼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지리의 고택들이 주욱 이어진다. 그 끝 즈음 오른쪽 동창천변에 선암서원이 위치한다. 금천교와 선암서원을 중심으로 동창천변을 한 바퀴 걸을 수 있는 2㎞ 거리의 생태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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