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구상 시인 탄생 100주년의 해…조용한 대구?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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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5   |  발행일 2019-04-25 제31면   |  수정 2019-04-25
[영남타워] 구상 시인 탄생 100주년의 해…조용한 대구?
백승운 사회부 특임기자 겸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팀장

구상 시인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태어났다. 올해는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평생을 기독교적 존재관으로 살아온 시인은 시를 통해 견고한 구도의 삶을 이어갔다. ‘삶을 노래하는 구도자’ ‘한국시단(韓國詩壇)의 거목’이라는 수식어가 이름 뒤에 붙는 이유다. 시인으로서 이력은 화려하다. 프랑스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이면서 1999년과 2000년에는 노벨문학상 본심 후보에 올랐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돼 아직도 널리 읽히고 있다. 특히 그는 시인이면서 강직한 언론인이었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을 당시에는 이승만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가 영남일보에 쓴 기명기사는 한 시대를 증명하는 명문(名文)으로 남아있다. 행간을 읽을 때마다 당시의 긴박한 정황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다. 후배기자이기도 한 필자가 그를 언론선배로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상 시인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이 신부가 될 만큼 믿음이 깊은 가톨릭 집안이었다. 시인이 네 살 되던 해, 가족들은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리로 이사하게 된다. 부친이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맡으면서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해 불교·기독교 등 종교의 철학적 근거를 배우며 정신적 근원을 다졌다. 1941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 북한 함흥에서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일했다. 이후 광복을 맞았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뜻하지 않은 필화사건을 겪어야 했다. 급기야 반동작가로 몰리면서 결국 월남한다.

구상 시인이 대구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6·25전쟁이 일어나면서다. 당시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의 주간으로 일했던 시인은 피란지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전쟁의 참화를 몸소 받아들이며 펜을 들었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종군했다. 무엇보다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문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피란문단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1·4후퇴를 전후해서는 영남일보에 피란 보따리를 풀었다. 영남일보의 배려로 아예 신문사에 집무실을 꾸리고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휴전 협정이 있었던 1953년에는 대구에서 가까운 칠곡 왜관에 집을 마련해 정착했다. 전쟁 직후에는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언론인으로서의 큰 족적을 남겼다.

시인으로서, 기자로서의 그의 이력은 짧은 글에 담기에 부족하다. 그만큼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탄생 100주년이 뜻깊은 이유다. 이러한 가운데 올해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2019년 기준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열기로 했다. 구상 시인도 포함됐다. 두 단체는 가을께 ‘구상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시낭독 및 음악회’를 단독으로 개최한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구상선생기념사업회도 의미있는 행사를 준비 중이다. 지역에서는 시인이 정착했던 칠곡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칠곡군은 왜관읍 순심여자중·고등학교와 왜관초등학교 사이 골목길에 가칭 ‘구상 시인과 이중섭 화가의 우정의 거리’를 조성한다. 구상 시인은 생전에 화가 이중섭과 막역한 사이었고,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화가 이중섭이 칠곡에 드나들며 그린 그림이 ‘구상네 가족’과 ‘왜관성당 부근’이다.

그런데 대구는 유난히 조용하다. 구상 시인을 기리는 조촐한 행사조차 열린다는 소식이 없다. 지자체는 물론 문학계에서도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최근 수성구에서 고모역 복합문화공간에 구상 시인의 시비를 세운 것이 전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상 시인은 전성기 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6·25전쟁 때부터 1974년 서울로 이사가기 전까지 대구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전성기 시절 쓴 작품의 뿌리가 대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체취는 아직도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작품과 장소성이 공존하는 곳이 대구인 셈이다. 문학은 시간을 초월하는 장르다. 과거의 것이 현재로 이어져 미래로 관통하는 장르가 문학이다. ‘10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상징성과 함께 구상 시인의 문학세계와 정신을 기려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오로지 후대의 몫이다. 구상 시인 탄생 100주년의 해, ‘조용한 대구’가 못내 아쉽다.
백승운 사회부 특임기자 겸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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