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공공선이란 이름의 ‘공공악’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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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4   |  발행일 2019-04-24 제30면   |  수정 2019-04-24
말만 하면 공공선 운운
‘반대파 제거용’이라면
공공선은 공공악으로 추락
차별없지만 격차는 인정하는
자유시장경제 시스템 절실
[동대구로에서] 공공선이란 이름의 ‘공공악’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모두 옳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서로에게 저주의 칼이 되고 있다. 이미 남한은 말로 분열돼 있고 북은 말로 통일돼 있다. 북한의 말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이 더 공공선으로 보일 수 있다. 지금 남한의 지식은 공통분모가 없다. 언어는 이미 설득용이 아니다. 이 나라의 말은 이제 대화가 아니라 ‘저격용’이다. 남북의 말전쟁보다 더 치명적이다.

광복 직후. 이 나라엔 빨강과 파랑밖에 없었다. 빨강은 ‘인민’의 이름으로, 파랑은 ‘국민’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였다. 미국과 소련의 사주 때문이다. 그 사주는 민족·자본주의 결합체인 제국주의 야욕 탓이다. 남북간에‘민주(民主)’란 공통분모가 있었지만 그 민주는 공존·협상불가. 한쪽은 시장경제(자본), 또 한쪽은 ‘김일성이즘’에 의해 굴러간다.

빨강은 평등·공산의 가치, 파랑은 소유욕을 원동력으로 본다. 보기엔 빨강이 더 공공선 같다. 파랑은 세계 10위권 무역대국이 돼버렸다. 개인의 소유욕 때문 아닐까. 하지만 빨강의 일사불란한 가난에서 한민족의 원형질을 찾는 이도 많다.

밤의 한반도를 찍은 구글지도. 빨강 영토는 깜깜하다. 파랑은 불야성. 누군 남쪽의 불빛을 미국의 빛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어둠의 통일을 꿈꾸는가.

지금 국민과 인민 사이에 ‘시민’이란 신 그룹이 태동했다. 천하무적인 시민은 이미 공공선이다. 민원·시위·농성·복지도 공공선. 그들은 ‘품앗이정신’이 출중하다. 새벽이라도 특정 시위·농성현장으로 곧장 달려간다. 하지만 국민파는 지원사격에 극도로 인색하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 여론은 온통 시민여론뿐. 그 여론 위에선 대한항공조차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민노총의 파워는 청와대 파워를 이미 넘어섰다.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최상위포식자 정치세력이 돼버렸다. 그들이 CEO랄 수 있다. 그들의 의지 속에는 이런 메시지가 장착돼 있다. ‘미국 아웃, 대기업 아웃!’ 대한민국의 영광은 오직 약자의 몫’. 언뜻 공공선인 것 같은 그 메시지가 실은 먼 후일 ‘공공악’이 될 것 같았다.

회사 공용차는 왜 몇년도 안돼 폐차 지경인가. 자가용 승용차는 왜 10년이 지나도 반들거리는가. 내것이라는 소유욕 때문이다. 이게 전제되지 않으면 문명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누군가 소유욕을 ‘공공재’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유욕을 ‘빈익빈부익부 바이러스’로 분석했다. 자기들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는 걸 그들은 고백하지 않는다.

공공선? 언어로만 도달할 수 있고 현실에선 영원히 구현될 수 없는 ‘신화(神話)’로 보였다. 연일 인기 유튜버의 태극기·촛불 공공선 담론이 난무한다. 극도의 이견대립. 중립코너는 없다. 이미 선을 넘은 것 같다. 말로 벌이는 제2의 6·25전쟁이 남한 전역을 휩쓸고 있다. 빨강과 파랑은 상대 논리를 박살낼 수 있는 끝없는 대응논리를 핵폭탄처럼 구축해놓고 있다. 무늬만 한 국민이다. 말의 수위로 본다면 남북 대결보다 더 저주스럽다.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도 남의 두 진영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시급 1만원시대’로 가는 우리. 하지만 갑을 생계전선은 공멸구도. 그런 와중에 ‘평등세상론’은 욱일승천 기세. 이 구도 또한 부담스럽기만 하다. 능력·실력 차이. 그게 자리·몸값으로 나타난다. 그걸 부정하면 시장도 무사할 리 없다. 국민MC K는 ‘판사와 목수의 망치가 동등하게 대접받는 평등세상’을 꿈꾼다. 아쉽다. 그는 왜 정규·비정규직 목수망치 평등론부터 먼저 외치지 않았을까. 그의 연봉은 억대. 평등망치주의자의 출연료를 최저임금 8천350원에 맞추면 어떻게 될까. 출연료는 당연히 차이가 나야 되고 그러면서도 동등한 신분의 세상. 멋진 말이다. 하지만 어쩜 그게 공공선 같은 공공악으로 들렸다.

지구는 23.5도 기울어져 자·공전한다. 그 기울기(격차) 때문에 지금까지 생명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걸 0도로 바로 세우려고 하면? 모든 게 다 죽는다. 차별은 극복해야 하고 격차는 선순화시키는 것. 그게 민주주의의 본질 아닐까.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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