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박씨의 조용한 一喝(일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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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3   |  발행일 2019-04-23 제30면   |  수정 2019-04-23
고전소설 ‘박씨전’ 등장하는
이시백은 학문에 능통해도
추한 외모의 아내 박씨 외면
미인 모습으로 변신한 아내
외모로 판단하는 위선 비난
[3040칼럼] 박씨의 조용한 一喝(일갈)

외모지상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다. 외모가 개인과 개인 간의 우열을 가리는 척도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외모에 집착하는 왜곡된 풍조가 사회적 관습으로 스며든 것이다. 대학가 신입생들의 외모를 등급으로 매겨 성(性)적으로 대상화한다든가, 취업 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형이나 다이어트 등 외모관리를 하는 것이 일상화된 현실은 외모지상주의가 몰고온 사회적 병폐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표지다. 이제는 개인을 구성하고 판단하는 다양한 자질이 모두 배제되고 외모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외모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고 가치를 매기는 행위는 ‘박씨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배경으로 삼은 고전소설 ‘박씨전’에서는 박씨라는 허구적 여성 인물과 인조(仁祖)를 위시하여 이시백(李時白), 임경업(林慶業), 김자점(金自點) 등과 같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남성 인물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부분적으로나마 승리의 서사를 내세움으로써 전쟁의 상흔을 보듬어준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달리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으로 끝난 병자호란은 명백하게 패배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를 심어주었고, 이에 대한 일종의 치유의 서사로서 ‘박씨전’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박씨전’에 등장하는 이시백의 박씨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변화다. ‘박씨전’에서 이시백은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시서백가(詩書百家)에 능통한 당대의 뛰어난 인재로 그려진다. 이시백의 아버지 이득춘은 금강산의 박 처사를 만난 후 그의 비범함에 반해 자신의 아들을 박 처사의 딸과 결혼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박씨전’에서는 박 처사의 딸 박씨의 용모를 흉측하게 묘사한다. 붉은 피부는 거칠고 입과 코가 한 데 닿아 있으며, 눈은 달팽이 구멍 같고 입은 두 주먹을 넣어도 넉넉할 정도로 크며, 이마는 메뚜기같이 긴데다가 머리카락은 짧고 거칠다. 이시백은 아버지의 명 때문에 박씨와 결혼하지만, 결혼 후에는 박씨의 추한 외모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박대하고 미워하기에 이른다. 박씨는 묵묵하게 자신에게 향하는 조롱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왕이 칭찬할 정도로 시아버지의 조복(朝服)을 훌륭하게 짓고 넉넉지 못한 가산(家産)을 불리며 남편의 과거급제를 돕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씨는 외모 때문에 온전한 가족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박씨는 자신에게 부여된 액운(厄運)이 다하자 허물을 벗고 서시(西施)와 양귀비(楊貴妃)도 미치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미인으로 변한다. 그러자 상황은 역전된다. 박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그녀를 외면했던 이시백은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며 박씨와의 동침을 갈망하기 시작한다. 박씨는 그런 이시백을 모른 척 며칠을 지내다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 “군자는 다만 미색만 생각하여 나를 추비하게 보고 인류(人類)로 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고도 오륜(五倫)을 실천하고 부모를 효양(孝養)할 수 있겠소?”

문필에 능하고 세간의 칭찬을 받던 이시백도 외모만으로 박씨를 재단하고 그녀의 지혜와 능력을 도외시했다. 박씨가 허물을 벗고 미인이 되었을 때에야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는 모습은 외모로 사람의 가치를 따졌던 이시백의 허위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박씨의 조용한 일갈(一喝)은 오늘날 외모를 가치판단의 중심에 두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유효한 의미를 가진다. 물론 스스로 외모를 가꾸는 행위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욕망은 그 자체로 문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아름다움이 외모에서만 비롯된다는 편견과 미추(美醜)의 구분이 곧 우열의 구분으로 연결되는 잘못된 인과관계는 지양해야 한다. 외모지상주의의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외모가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과 외모로 인한 인과관계가 문제다. 박씨가 이시백에게 건넨 질문에서 우리가 간취해야 할 것은 외모로 인간을 판단했을 때 드러나는 위선이다. 그런 위선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겉모습에만 매달리는 한 외모지상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다른 자질들을 스스로도 외면하게 될 것이다.

신호림 (안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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