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임시정부 100주년과 대구경북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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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8   |  발행일 2019-04-18 제30면   |  수정 2019-04-18
항일투쟁 앞장선 대구경북
나라 위기때 구국정신 빛나
경제가 아무리 힘들다해도
당시 흘린 피와 눈물 기억을
위대한 그 정신 되돌아 봐야
20190418
이상식 전 대구경찰청장

지난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3·1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남짓 지난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선비정신으로 충만해 임진왜란 때부터 의병활동에 앞장섰던 대구경북 사람들은 임시정부의 수립과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에도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우리는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기억해야 한다.

대구 사람 현정건은 ‘빈처’ ‘운수좋은 날’을 쓴 소설가 현진건의 형으로 상해에서 두드러진 독립 운동가였다. 현정건은 1910년 결혼 후 곧바로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1914년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본국으로 보낸 전문에도 등장한다. 1919년 2월 상해에서 국내로 밀입국했다가 일제경찰에 붙잡혀 체포되었고 한 달 후에 석방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나 사회주의만을 고집하지 않았고 좌우합작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도 앞장섰다. 그러한 활동의 결과로 현정건은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28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3년의 옥살이 끝에 석방되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6개월 후인 1932년 6월10일 생을 마쳤다.

역시 대구 출신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였다.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상정은 중국의 기독교 군벌이자 한국독립을 후원한 풍옥상의 지원 아래 항일 투쟁에 참가 하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과 결혼 후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수차례의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였다. 이상정은 임시 정부 활동을 통해 한민족에 대한 자부와 자존을 크게 강조하였으며 중국과의 협조에 있어서도 평등관계를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특히 중국 국부군 정보기관 남의사(藍衣社), 미군 첩보기관인 OSS와도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는 등 외교적인 수완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선산 출신 허형식 장군은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5촌 조카다. 허위 선생 사망 이후 일가가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허형식 장군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해 1939년부터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으로 활동했다. 1940년을 전후해 일제가 관동군을 늘려 토벌작전에 나서면서 많은 독립군이 소련 영내로 이동했지만 허 장군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이어 가다가 1942년 경안현 소릉하 계곡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전사했다. 허 장군은 이육사 시인 어머니의 사촌동생이고 독립운동 당시에도 이육사와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으로 표현된 인물이 허형식 장군이라고 보는 견해가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석주 이상룡 선생이 안동지역의 선비이자 부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가 망국의 수치를 당하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해 일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활동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대구경북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자기를 희생해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선 위대한 정신을 지녔다. 최근 대구경북의 경제가 어려운 나머지 훌륭했던 대구경북의 정신마저 쇠락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임시정부 100주년이 자랑스러운 대구경북 정신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이상식 전 대구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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