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하) - 묵계종택과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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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08   |  발행일 2019-03-08 제36면   |  수정 2019-03-08
편안하면서 위엄 있는 종택, 금강소나무 둘러싸인 장엄한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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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종택의 솟을대문 앞에 200년 된 상수리나무가 서 있다.

길안천을 사이에 두고 만휴정 계곡과 마주보는 계명산(鷄鳴山)자락의 구릉지에 묵계마을이 자리한다. 집들로 채워진 왼쪽의 낮은 구릉 한가운데에 묵계종택이 위치하고, 우거진 낙엽수 사이에 오래된 당집이 있는 오른쪽의 높은 구릉 마루에 묵계서원이 있다. 구릉과 구릉 사이에는 아치형 창이 있는 사각의 버스정류장과 이제는 애용되지 않는 콘크리트 소식판, 그리고 ‘묵계리 선항(仙巷)’이라 새겨진 돌기둥이 모여 서있다. 당집이 있는 선항, 신선의 거리. 그래서인가, 마을은 비현실적으로 고요했다.

북풍 막아주는 듯 대문앞 200살 넘은 상수리나무
6·25전쟁때 사당·사랑채만 남고 모두 불타 버려
긴담 너머 열지어 솟은 측백나무·안팎 배롱나무

누각 읍청루에 오르면 삼문 너머 반짝이는 길안천
청렴결백 ‘보물유청백’가풍 이어가는 보백당 후손


◆묵계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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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서원. 1687년 창건되었으며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를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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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종택의 사랑채인 보백당. ‘청렴이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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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종택 정침 옆에 자리하고 있는 사당. 편안한 얼굴의 문이다.

종택의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대문 앞에는 200살이 넘은 상수리나무가 북풍을 갈기갈기 흩트린다. 문 안으로 들어서다 살짝 당황한다. 섬 같은 화단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하나의 길은 화단의 오른쪽을 에둘러 흙담을 타고 정침으로 나아가고, 또 하나의 길은 화단의 왼쪽을 에둘러 사랑채로 나아간다. 보다 가까운 사랑채는 김계행의 호 ‘보백당(寶白堂)’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청백이 보물이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4칸 대청과 2칸 온돌방으로 구성돼 있으며 대청과 방 사이에는 불발기창이 있는 장지문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에 걸쇠가 내려와 있는 것을 보니 분합문일 게다. 한여름 문을 열면 대청은 활짝 넓어진다. 지금은 제청으로 사용되고 다양한 소모임 장소로도 대여된다. 김계행의 첫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1454년 묵계마을 남상치의 딸과 재혼했다. 원래 묵계마을은 의령남씨 세거지였다고 전해지는데, 아들이 없던 남상치가 사위인 김계행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외손봉사를 당부했다고 한다. 김계행이 묵계에 들어온 때는 1500년경이다. 김계행은 이곳에서 만휴정을 오가며 여생을 보냈고 그로부터 묵계마을은 안동김씨 세거지가 되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ㅁ’자형의 집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 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댓돌에 신발은 있지만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다. 용계당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 툇마루는 공연무대로 이용되고 안채의 방은 숙박이 가능하다. 정침의 왼편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위치한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의 소박한 건물이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의 전면에 솟을대문의 사주문을 세웠고 우측에도 일각문이 나있다. 솟을대문의 가운데 상부가 곡선이다. 사당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어딘가 편하지 않는데 묵계종택의 사당은 어쩐지 편안하다. 안팎으로 선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묵계종택은 6·25전쟁 때 사당과 사랑채만 남고 모두 불탔다고 한다. 현재의 다른 건물은 그 후에 다시 지었다. 정침에서도, 보백당에서도,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는 시선은 없다. 시선은 푸르른 수목들에 곱게 걸러진다. 사당 옆 북측의 긴 담 너머에 측백나무가 열 지어 장하게 솟아 있다. 대문 앞 상수리나무처럼 북풍을 막아주는 것일까. 바람은 부드럽고 햇살은 따뜻하다. 수목들은 싱그럽고 집들은 견고하다. 묵계종택은 편안하면서도 독특한 위엄을 가진 집이다.

◆묵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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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서원. 1687년 창건되었으며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를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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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서원의 강당인 입교당. 오른쪽은 동재인 극기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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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서원의 사당 청덕사. 서원 주변은 금강소나무 숲이다.


묵계서원 표석 아래에 누군가 ‘직진 300m’라 적어 놓았다. 거리를 알고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성마른 사람을 기쁘게 한다. 언덕의 가장자리를 따라 오르는 5분 내외의 길, 저 아래 길안천을 바라보며 걷는 느긋한 길이다. 삼문은 진덕문(進德門)이다. 문이 잠겨 있어 강당 옆 협문으로 들어선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 몹시 단정한데 오밀조밀한 구조에 안온함마저 느껴진다. 강당 한가운데에 걸린 단단한 글씨체의 묵계서원 현판이 공간 전체를 힘 있게 안고 있다.

묵계서원은 숙종 13년인 1687년 창건되었고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凝溪) 옥고(玉沽)를 배향하고 있다. 옥고는 세종 때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낸 이로 청렴결백하고 학문으로 명망이 높은 청백리였다 한다. 보백당은 사후 1858년에 종2품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859년에는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정헌(定獻)’이란 시호를 받았다. 묵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 훼철되었다가 후에 복원되었고, 보백당은 1909년에 불천위(不遷位) 교지를 받아 영원히 사당에 모셔지게 되었다. 최근인 2015년 선생의 실기 책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단다. 보백당과 만휴정 현판은 2016년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6칸은 마루, 좌우는 방이다. 마루 안에 입교당(立敎堂)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 앞으로 동재인 극기재(克己齋)가 있고 삼문과 일직선상에 누각인 읍청루(淸樓)가 시원 담백하게 서있다. 읍청이란 맑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누각에 오르면 삼문 너머 길안천이 반짝거린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인 청덕사(淸德祠)가 있다. 서원의 오른쪽에는 후대에 세운 신도비각이 따로 담장을 두르고 자리한다. 서원 왼쪽에는 주사(廚舍)가 있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건물로 창건 당시의 유일한 건물이다. 현재 보수공사 중이라 비계에 갇혀 있다. 서원 주변은 금강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대단히 장엄한 모습이다. 이들 중 80그루가 경북도청 신도시 녹지공원 조성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청백을 가법으로 이어가고, 공근(恭謹)을 대대로 지켜가며, 효우(孝友)하며 돈목(敦睦)하라. 교만이나 경박한 행동으로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말라. 상제(喪制)는 정성과 경건을 다하고, 낭비나 허례를 말라.’ 얼마나 준엄한 유훈인가. 보백당 후손들은 특히 ‘보물유청백’이란 가풍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공직에 있는 이라면 더욱더. 문중에서는 선생의 유훈을 받들어 1993년 ‘보백당장학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매년 후손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청렴공무원 자녀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극기재 마루에 ‘꼬마도령의 놀이터’라는 안내가 있다. 묵계서원에서는 전통 공예와 전통 음악, 전래 놀이 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제향과 유림의 회합, 학문의 강론 장소였던 서원이 이제 시민과 공유하는 문화이자 교육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극기재 앞 홍매화에 붉은 꽃봉오리가 맺혔다. 경칩이 그제였으니 내일부터 만개일 터. 곧 선항 마을의 고요는 봄에 묻히겠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안동방향으로 가다 안동분기점에서 당진영덕고속도로 영덕방향으로 간다. 동안동IC로 나가 35번 국도 청송, 영천방향으로 조금 가면 길안면 묵계리다. 묵계리 표석에서 종택까지 약 30m, 서원까지 약 300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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