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능화판

  •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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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5   |  발행일 2019-02-15 제23면   |  수정 2019-02-15

연못에 나는 마름의 열매는 어릴적 간식 중 하나였다. 가시 같은 뿔이 솟아 있는 새까만 이 열매는 가죽질의 껍질 속에 밤 맛이 나는 흰색 견과육이 들어 있다. 한해살이 부엽식물인 마름은 뿌리는 진흙 속에 박고 줄기가 길게 자라서 잎이 물 위에 뜬다. 잎이 물 위에 뜰 수 있는 것은 잎자루(葉柄)에 공기주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잎자루에 굵은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물고기의 부레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공기주머니다. 밤 맛이 나는 견과육 때문에 마름열매를 물밤(水栗)이라고도 하는데, 경북과 전북 이북 지역에서는 마름을 ‘말밤’ 혹은 ‘말’ ‘물마름’이라는 방언으로 부른다.

마름 열매는 단순한 간식거리를 넘어 약으로도 이용됐으며 요즘에는 이것을 재료로 한 음식도 다양하게 나온다. 생태 관련 행사장에서는 열매로 목걸이를 만드는 전통공예 체험 부스가 등장하고, 우포생태공원에서는 마름 목걸이와 열쇠고리를 탐방객들에게 배포하기도 한다.

마름의 잎은 잔톱니가 많이 나 있는데, 보통 삼각형이라고 하나 마름모꼴과 삼각형의 중간쯤 된다. 마름의 잎은 네 변의 길이가 모두 같은 4각형의 이름인 마름모의 어원이다. 마름모라는 이름이 기하학에 차용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각(角), 변(邊) 등 딱딱한 한자어만 쓰이는 기하학용어에 수생식물인 마름이나 일상 생활도구인 사다리를 끼워 넣어 어휘의 연화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작고 앙증맞은 흰색의 마름꽃(菱花)은 오래된 도자기와 기와, 가구, 베갯잇 등 도처에 등장한다. 특히 책 표지는 대부분 능화가 장식하고 있다. 고서의 표지에 찍힌 문양은 능화 외에도 여럿이지만 책표지에 문양을 찍기 위해 제작한 목판이 능화판(菱花板)으로 불릴 정도로 마름꽃 문양이 일반화돼 있다.

상주박물관은 ‘선비가 사랑한 무늬, 능화판’이란 주제로 각종 능화판과 표지에 능화문이 장식된 고서를 내달 10일까지 전시한다. ‘삼강행실도’ 표지에는 마름꽃과 원형의 문양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표지에는 마름모꼴과 연꽃모양이 찍혀 있는 것을 이 전시회를 보고 처음 알았다. 문양의 대부분은 기하학적인 사방연속무늬인데, 마름모꼴이 많아 ‘능화판의 능화가 마름꽃이 아니라 마름모꼴 틀 속의 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하수 중부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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