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3]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리

  • 최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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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31   |  발행일 2019-01-31 제22면   |  수정 2019-02-20
피아노 위 작은 천주머니엔 뭐가 있었나…추측만 남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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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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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 2013)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다. 내 소감의 핵심은 ‘역시 하루키구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 몇가지를 포함한다.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문체의 유려함이 느껴질 만큼 그만의 간명한 문체가 의식되면서 잘 읽힌다는 것이 첫째다. 자신의 모국어인 일본어 감각으로 쓰지 않고 영어를 번역하듯이 쓴다는 하루키 자신의 말대로, 이 소설 또한 한국어 번역문이 번역이라는 느낌 없이 매우 자연스럽다. 역자의 능력도 있겠지만 작가의 글쓰기 전략이 가져다 준 성과라 하겠다.

둘째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에서도 다른 문화예술 작품이 하나의 키워드처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다. 리스트가 40여 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피아노곡 ‘순례의 해’ 중 첫째 해 ‘스위스’ 편의 여덟 번째 곡으로서 일반적으로 ‘향수’로 번역된다. 하루키는 이 제목의 의미를 나름대로 섬세하게 설명하고, 다른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주 앨범에 따른 차이까지 지적하며 반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셋째는 선명한 성적 묘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역시 하루키군’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러한 묘사가 제시된 이유나 그것이 주는 내용적인 효과, 이 장면이 꼭 있어야 할 이유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러한 설정 자체가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 만큼, ‘시로’와 ‘구로’ 외에 ‘하이다’까지 얽혀 있는 이 부분은 그 자체 독립적으로 과장되어 있다. 역시, 하루키다. 이와 유사하게, 독자의 추측만 남기면서 의미가 불명확한 채로 삽입되는 에피소드가 있다는 점이 넷째다. 인간 개개인의 색깔을 보는 대가로 죽음을 선택한 재즈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가 연주할 때 피아노 위에 올려놓은 작은 천 주머니 속의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강조되고 부추겨지는 것이, 이러한 에피소드의 정체불명 상태를 한층 강화한다. 이 모두는,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 효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것을 작가 자신이 꺼렸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 할 만하다.


세계적 작가가 된 하루키의 특징
의미가 불명확한 에피소드 삽입
번역 느낌없이 자연스러운 문체
성적묘사·無국적성도 손에 꼽혀

누구나 좋아할만한 읽을거리 내놔
‘정통문학 거리둔 문화상품’평가



이러한 특징들은 하루키의 명성을 드높인 ‘노르웨이의 숲’(1987)으로부터 최근의 ‘기사단장 죽이기’(2017)까지 두루 확인되는 것이다. 편의상 순서를 매기면서 하루키 소설의 특징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를 통해 열거하고 있지만, 이러한 순서가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확인되는, 하루키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꼽자면 ‘국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국적성이야말로 하루키의 거의 모든 소설들이 일관되게 보이는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에 국적이 없다는 말에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주된 배경은 일본이고, 특히 나고야의 지역적 특성이 이야기되고도 있는 까닭이다. 나고야에서 사업을 하는 ‘아카’의 말에서 보이듯 도쿄와도 다른 나고야의 특색이 언급되고 그러한 특징 위에서 ‘아카’가 사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이든 나고야든 그러한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중심인물들의 운명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고야나 도쿄라는 현실이 쓰쿠루의 운명에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음은 분명하다. 주인공 쓰쿠루가 핀란드를 방문하지만 일본과는 다른 핀란드의 현실이 어떠한 의미를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나고야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일본이자 나고야이기 때문에 인물들의 삶과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주인공 쓰쿠루와 네 명의 친구가 만든 ‘하나의 완벽한 공동체’로서의 그룹 또한 나고야라는 배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그룹은 어느 지역에서나 찾을 수 있을 어린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의 유대 관계일 뿐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를 포함하여 하루키의 소설들이 국적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소설을 읽는 각국의 독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보듯이 작품을 읽(을 수 있)는 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노르웨이의 숲’의 공간적 배경이 일본이며 시간적으로는 전공투가 나서던 1960년대의 극심한 혼란기라는 사실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그러한 시공간적 현실이 중심인물들의 관계와 각각의 인생행로에 어떠한 의미 있는 영향도 끼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나 ‘1Q84’처럼 환상적인 공간 배경을 갖는 소설이, 배경이 실제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이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해 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국적이 없다는 점,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의 눈에는 매우 자명하다. 이에 대한 해석에서만 입장이 갈릴 뿐이다. 일본 소피아 대학의 매튜 스트레처 교수는 자신이 편한 ‘무라카미 하루키: 도전하는 작가들’(Sense Publishers, 2016)에서 하루키를 코스모폴리탄적인 작가, 전 세계적인 이야기꾼(storyteller)으로 규정한다. 스트레처 교수는 하루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부로와 달리 ‘일본’ 문학의 대변자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하루키가 모든 문화들이 솟아나오는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공간에서 신화적,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이야기의 핵심이 문화의 경계를 넘어 세계 여러 나라의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글로벌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해석이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알려주는 사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진실은 하루키의 소설이야말로 세련되게 잘 만들어진 문화상품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열거한 다섯 가지 특징이 이러한 판단의 근거다. 요컨대 그의 소설은 문장을 다듬듯이 정신 또한 다듬은 성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문학이 정신을 다듬는 자리란 고유의 역사 전통과 문화적 특성을 갖춘 구체적인 현실과의 상관관계 속에서인데, 바로 이러한 현실이 그의 소설에서는 휘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설명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현대문학, 2016)도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떻게’만 있을 뿐 ‘무엇을’과 ‘왜’는 없다는 사실이다. 소설을 쓰는 방법과 그렇게 쓴 것을 보다 넓은 문학 시장에 내놓으려고 노력한 방식만을 말할 뿐, 소설을 쓰는 이유나 목적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문단과는 거리를 둔 채 전 세계의 독자들이 두루 좋아할 만한 잘 만들어진 읽을거리를 제공하려고 노력해 온 것을 알려주는 이 책이야말로 문화산업적인 전략의 한 가지 사례라 할 만하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모든 문학이 사회와 역사, 인간의 삶에 대한 탐구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도, 문화상품으로서의 서사문학 또한 그 자체로 존재 의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만, 하루키의 소설을 두고 노벨문학상 운운하며 문학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오도하는 상업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한마디 하는 것일 뿐이다. ‘태백산맥’이나 ‘토지’ 등과 종류가 완전히 다른 서사물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호도하는 문학 상업주의가 하루키 소설을 축으로 해서 계속 횡행하는 현실을 한 번쯤은 경계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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