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겨울방학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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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14 08:01  |  수정 2019-01-14 08:01  |  발행일 2019-01-14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겨울방학 책읽기

며칠 전 어느 시인이 찹쌀떡을 먹고 싶다는 카톡을 보냈다. 겨울밤 골목길에서 ‘찹 싸~알떠~억’이라고 외치며 팔던 그 찹쌀떡이 그립다고 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긴긴 겨울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문풍지 바르르 떨리는 봉창으로 스며들던 그 구슬픈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간혹 어머니께서 행상을 불러 아이 수만큼 찹쌀떡을 사면서 언 입을 녹이라고 그에게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주던 모습도 떠올랐다. 카톡을 보낸 시인과 겨울 이야기를 하던 날 낮에 고교 진학을 앞둔 학생이 엄마와 함께 찾아왔다. 학교에 가기 전 이 겨울에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다.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바람직한 책 읽기에 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 6학년 겨울 방학 때 형이 ‘삼국지’를 사왔다. 역자는 월탄 박종화 선생이었던 것 같다. 전 5권으로 기억되는 삼국지를 그해 겨울 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방학이라 다른 읽을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목차만 보아도 여러 장면들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세 번째는 원래의 줄거리에 살을 붙여 상상할 수 있었고, 나름의 인물평까지 보탤 수 있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매번 너무 재미있었다. 아직도 ‘도원결의’를 떠올리면 가슴이 떨린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수한 영웅호걸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살아있는 현실 속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삼국지 이후 무협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생 시절 수백 권의 무협지를 읽었다. 그때 고사성어를 많이 익혔고 읽기 속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고교 진학을 앞둔 겨울 방학 때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세 번 읽었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전반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이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힘에 끌려 두 번째는 좀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고, 세 번째는 중요한 구절을 암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좋은 책이 너무 많다. 연령별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를 도와주는 독서지도사가 있을 정도다. 나는 읽은 책의 권수보다는 좋은 작품을 제대로 읽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장이 정확하고 문체가 좋은 책을 거의 암기할 정도로 반복해서 읽으면 문장력이 좋아진다. 좋은 문장을 많이 암기하면 어느 순간 저절로 좋은 글을 쓰게 된다. 요즘은 책을 대충 읽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면 어떤 책도 내 몸속에서 피와 살이 되지 않는다.

스트레칭도 같은 동작을 몇 세트 반복해야 효과가 있다. 어떤 책을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잊어버리게 되며, 지적 근력을 강화하고 글쓰기 능력을 배양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학생에게 몇 권의 책을 추천하면서 책 표지가 닳아 질 정도로 반복해서 읽어보라고 권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틈틈이 바깥으로 나가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흘리고, 연주회나 전시회도 자주 가보라는 말을 간곡하게 덧붙였다.

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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