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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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4   |  발행일 2018-12-14 제36면   |  수정 2018-12-14
한 칸 누문 속 돌계단 한 발 한 발 오르니 솟아나는 대웅전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봉정사
만세루 누문 속 돌계단.

도라지꽃이 만발했었지, 10여 년 전 봉정사(鳳停寺) 가던 길엔. 오늘 길가 빈 밭들은 스산하고 땅은 숨도 삼켜 쉰다. 봉정사 매표소를 10여m 앞두고 멈칫한다. 이대로 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천변의 주차장에 몇 대의 차가 서 있다. 천 너머 사하(寺下)의 가겟집에서는 작은 LED 전광판이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먼 곳의 소형 포클레인은 단호한 단말마로 채찍질한다. 그래. 걸어야겠지. 매표를 하고 약간 가파른 아스팔트길을 오른다. 뒷짐을 지고, 몇 걸음 만에 벌써 사하촌의 기미는 만 리 밖이다. 이상하게도 이 길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잠시 후 승용차가 오른쪽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차로 올라가도 되나?” 청하는 이들에게는 “그리 하라” 허락하는 모양이다. 문득 기억이 났다. “차로 올라가라”던 오래전 그날의 목소리.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봉정사
16세의 퇴계가 노닐었고 50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는 명옥대. 정자는 후학들이 세웠다.

퇴계가 16세때 벗들과 함께 노닐던 곳
50년 지난 후 벼슬 그만두고 다시 찾아
후학들 모여 그곳에 세운 정자 ‘명옥대’

일주문·활엽수의 길 지나 돌탑과 마주
가파른 돌계단 올라서니 웅장한 만세루
현존 最古 목조 건물 극락전·삼층석탑
능인스님 종이 봉황이 날아가 앉은자리

◆옥이 우는 곳, 명옥대

천을 거슬러 오른다. 산은 천등산(天燈山), 원래는 대망산(大望山)이라 하였다. 신라 문무왕 때의 일이다. 의상대사의 제자였던 젊은 능인스님은 수도를 위해 대망산 큰 바위굴에 들었다. 10년이 넘게 이어지던 수도정진의 어느 날 밤, 천녀(天女)가 나타나 스님을 유혹한다. 스님은 크게 화를 내며 천녀의 유혹을 뿌리쳤다. 이후 천녀는 하늘에서 등불을 비추어 굴을 환히 밝혔고 그때부터 산은 천등산, 굴은 천등굴이 되었다. 천등산은 고도 600m에 못 미치는 부드러운 산이다. 솔숲이 울창하지만 위압적이지는 않다.

길가 오솔길 앞에 ‘명옥대(鳴玉臺)’라 간결하게 새겨진 표석이 서 있다. 물소리를 향해 이끄는 좁은 길을 따르면 이내 부드럽게 주름진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물은 바위의 가장 깊은 주름을 타고 흐르다가 와락 뛰어내려 폭포가 된다. 물이 떨어지는 바위는 ‘낙수대(落水臺)’라 했다. 퇴계 이황은 16세 때 봉정사에서 벗들과 함께 약 3개월을 머물었다고 한다. 그는 글방에서 독서하며 때때로 벗들과 이곳에서 노닐었다 전한다. 이황에게 낙수대라는 이름은 썩 흡족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 서진(西晋)의 시인 육기(陸機)의 초은시(招隱詩) 중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주네(飛泉漱鳴玉)’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이곳을 ‘명옥대’라 명명했다. ‘옥이 우는 곳’이다.

계류 너머에 정자가 있다. 명옥대다. 현종 6년인 1665년에 후학들이 모여 퇴계가 노닐던 곳에 지은 정자다.

처음에는 방 1칸과 2칸의 누마루가 있는 3칸 건물이었고, 그 뒤에 승려들이 사용하는 승사 3칸을 더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의 정자는 1920년 즈음의 것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에 계자난간이 둘러 있다. 16세의 소년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566년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을 찾아 왔다. ‘이곳에 노닌 지 어느덧 오십년/ 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손잡고 놀던 사람 지금은 어디 있는가/ 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같이 그대로네.’ 그의 나이 66세 때였고,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이었다. 10년 전에는 명옥대를 알지 못했는데, 훗날에는 오늘을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천등산 봉정사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봉정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왼쪽 건물은 화엄강당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석탑 앞 돌탑에 돌을 하나 얹으며 말했다. “돌탑을 쌓았으니 복을 많이 받겠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봉정사
삼성각과 영화실. 마당의 동산에 수많은 돌탑이 쌓였다.



조금 더 솔숲이 이어진다. 나무들은 날씬하고 숲은 치밀하지 않다. 그 사이로 연푸른 하늘이 편안하게 드리워져 길은 안전한 아치다. 곧 수목의 밀도가 확연히 낮아지면서 부표와 같이 떠있는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길은 콘크리트다. 잎 떨어진 활엽수의 길, 돌탑을 지난다. 태양과 마주한 돌들은 구석구석 말간 얼굴들이다. 태양에 등진 돌들은 이끼에 덮였다. 음지의 초록들은 어딘가 슬픈 표정이 있다. 그리고 꽤나 너른 콘크리트 터가 펼쳐진다. 방문객들의 자동차는 이곳까지 오를 수 있다. 안내판 옆 화장실이 네모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

원뿔모양의 전나무 두 그루가 휘어진 길가에 높이 서있다. 뒤로는 스님의 채마밭에 배추들이 가지런하다. 그물담장이 허술하게 둘러진 배추밭 앞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웅장한 만세루가 가로막는다. 한 칸 누문 속 돌계단을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대웅전이 솟아오르고 화엄강당과 요사채인 무량해회(無量海會)가 양 앞을 협시한다. 대웅전의 좌측에는 극락전이 자리한다. 화엄강당의 배면과 고금당이 극락전 양 앞을 협시하고 마당 가운데에는 삼층 석탑이 서 있다.

극락전은 고려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중수한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천녀가 굴에 불을 밝힌 후 능인스님은 더욱 수행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능인스님은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렸고 봉황이 날아가 머물러 앉은 자리에 절집을 지었다. 봉정사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기록 등을 모두 불태웠다. 흙모래 마당이 질척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마당을 밟았을까. 기원할 것이 많았던 순정한 사람들, 깊은 신앙심을 가진 수행자들, 불안한 심장의 왕과 인민군들, 그리고 먼 나라의 여왕과 오늘의 소시민. 이곳 대부분의 건물은 보물이고 국보다. 봉정사는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영산암

요사채의 옆문을 나가 영산암으로 오른다. 우화루(雨花樓) 앞 너른 마당을 오래 배회한다. 단풍은 거의 졌고, 군데군데 무리지어 피어난 국화꽃들은 드라이플라워처럼 바스락거린다. 우화루 누문 안으로 들어선다. 짧은 돌계단 위에 건물들로 둘러싸인 뜰이 피어난다. 건물들이 빚어놓은 빛과 그림자가 뜰을 적시고 키 작은 석등과 동그란 동산이 살짝 고개를 숙인다. 영산암 양지 뜰에는 아직 꽃이 촉촉하다.

영산암은 우화루와 주불전인 응진전을 중심축으로 양쪽에 관심당, 송암당, 영화실, 삼성각이 오밀조밀 어깨를 겯어 뜰을 감추고 있다. 송암당 밖에는 부지런히 마련해 놓은 장작들이 낮은 외벽으로 서 있다. 대나무 발 쳐진 문 앞은 비어 있다. 영화실 옆에는 커다란 개집이 있고 스테인리스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응진전 옆에는 낮게 구획된 사각의 수돗가가 있고 하얀 수건 하나가 빨랫줄에 널려 있다. 관심당 툇마루 앞에 서서 우화루를 바라보았다. 소심하여 툇마루에 걸터앉지는 못하였다.

스님이 커다란 백구와 함께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오며 말씀하신다. “안녕하세요.” 백구는 잠깐 순한 눈빛을 보낼 뿐 한 번도 짖지 않았고, 오늘 처음으로 영산암 스님을 뵈었다. 비었던 문 앞에 흰 고무신이 가지런하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로 나가 안동 방면으로 우회전해 직진한다. 송야네거리에서 봉정사, 서후 방향으로 좌회전해 924번 지방도를 타고 간다. 봉정사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매표소 앞쪽 천변에 주차장이 있다. 봉정사 입장료는 어른 2천원, 군인과 학생은 1천300원, 어린이 6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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