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4> 국내 외국인과 해외동포의 의연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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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04   |  발행일 2018-12-04 제14면   |  수정 2021-06-22 18:04
일본인 교사마저 국권회복운동 취지에 감동해 의연금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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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당시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의연활동 자료가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종교인·교사·상인 등 다양한 직업과 국적의 외국인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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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해외에서 벌어진 국채보상운동 관련 내용이 전시돼 있다. 국채보상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미국·일본·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교포와 유학생 등의 의연도 줄을 이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깃발을 올린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경제적인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답게 전국을 대단히 빠른 속도로 흔들어놓았다.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친일세력을 제외하고, 성별과 연령과 신분을 초월한 각계각층에서 자발적·경쟁적·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운동의 규모를 키운 것이다. ‘국채는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온 국민의 의무’라는 공통된 인식과 ‘망국의 위기 앞에서 고작 3개월간의 단연(斷煙)쯤은 어려울 것이 없다’는 공감대가 동력으로 작동하였다. 이러한 확산에 기꺼이 뜻을 보탠 이들이 또 있었다. 바로 국내에 여러 가지 형태로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과 해외동포였다. 시리즈 4편은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했던 국내 거주 외국인과 애끓는 심정으로 조국을 돕는 데 발벗고 나선 재외국민에 대한 이야기다.

수원 성공회교회 브라이들 신부 앞장
신도·주민들 합세로 120원40전 모아
뒤이어 용주사 승려도 뜻 함께하기로
평안도선 천주교 프랑스신부들도 합류

일본 유학생 등 재외동포 동참 이어져
미국 교포단체 회원들도 의연금 출연
연해주 지역 블라디보스토크서도 성원

#1. 이방인들의 공감과 참여

먼저, 경기지역에서는 수원이 미담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수원에 자리하고 있던 성공회교회에는 한글 이름 부재열(夫在烈)인 브라이들 신부가 1905년부터 관할 사제로 봉직하고 있었다.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선교와 봉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그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에 그 내용을 미사 시간을 이용해 신도들에게 알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의 기도까지 올렸다. 이에 감화와 감동을 받은 신도와 주민들이 주머니를 열기 시작했다. 열기는 뜨거워서 곧 120원40전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모금되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근방에 위치한 용주사(龍珠寺)에도 마찬가지로 전해졌다. 승려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뜻에 힘을 얹기로 결정하고, 어려운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12원이나 의연금으로 희사한 것이다.

충북에서는 옥천군 창명학교(彰明學校)에 재직 중이던 일본인 교사 제광길(堤廣吉)이 도화선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알게 된 그가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본래 일본인이다. 하나 지금은 대한제국의 영토 안에 살고 있으므로 당연히 대한제국을 위하여 처신할 것이다. 그것이 만국통의(萬國通義)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오늘부터 단연 동맹에 참여하고자 한다. 보라, 제자들아. 너희들은 대한제국의 학생들이다. 하물며 일본인인 내가 이러하거늘 대한제국을 사랑하는 그대들의 마음이 어찌 나보다 못하겠는가.”

그러면서 무려 5원을 수금소로 보냈다. 그러자 학생들이 속속 동참하였고, 학생들의 동참은 곧 주민들의 참여로 이어졌다.

평안도에서도 외국인의 참여 소식이 들려왔다. 영유군의 천주교당을 맡고 있던 프랑스 신부 명약일(明若日)이 국채보상회에 10원을 의연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순식간에 주변에 영향을 미쳤다. 외국인 신부의 의연에 은혜를 받은 고용인이 자신이 받은 품삯 가운데서 2원을 의연함으로써 지역의 분위기를 대번에 뜨겁게 끌어올린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같은 영유군 내의 이화학교(梨花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일본인 교사 정류호빈(正柳好彬)도 선뜻 나섰다.

“어찌 보면 남의 나라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동아시아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보면 나 또한 아주 남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연활동을 보고 있자니 감동을 주체할 수 없다. 나도 기꺼이 동참하겠다.”

그러면서 2원을 의연하였다.

이러한 외국인의 국채보상운동 동참은 일부 특정한 지역에서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주요 도시를 비롯해 개항장 등 외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특히 청국 상인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는 우리 상인들이 보다 더 분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은 ‘대한매일신보’나 ‘만세보’ 등의 언론에 그대로 공개되었다. 진심 어린 찬사가 이어졌음은 물론이었다.



#2. 몸은 외국에, 마음은 고국에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뜻이 그러할진대, 국외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의 뜻은 오죽했으랴.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전해들은 재외국민들은 애가 끓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대구군민대회가 있었던 1907년 2월21일로부터 스물닷새가 지난 3월18일이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800명의 유학생이 유학생총회를 개최하고 한자리에 모였다.

“비록 우리가 타국에서 궁핍함에 시달리며 공부하는 처지이기는 하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자 유학생들의 단체였던 태극학회(太極學會)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발언하며 지지를 표명했다.

“이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구국운동입니다. 단연과 금주를 통해 비용을 절약하고, 이로써 국채를 보상하는 데 힘을 실읍시다.”

이때 유학생들이 작성한 취지서가 3월31일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재일본 한인유학생의 단연동맹취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경제는 국가에 필요하고 긴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법률만 가지고는 국가가 되지 못하나니, 법률이 고명한 로마제국도 경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망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지경에 당하였거늘, 어찌 경제를 강구치 않을 수 있겠는가. 경제란 적은 것으로 큰 것을 궁구하여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유학생으로 말하면 거의 800명에 달한다. 매일 아침 담배 한 갑씩이라도 6전이요, 한 달에 한 사람이 1원80전이니, 100명을 한 달로 곱하면 180원이고, 1년을 통계하면 2천160원이며, 800명으로 계산하면 1년 담뱃값이 결코 적지 않다. 하물며 전 국민의 담뱃값임에랴. 음식물은 끊으면 죽기 때문에 안 될 일이나, 무익한 연초를 끊는 데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니 일제히 단연하여 국채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웁시다.”

아울러 수금위원 3명을 선정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결과, 적지 않은 액수를 모을 수 있었다. 그들이 ‘황성신문사’에 보내온 의연금의 액수는 4월7일에 18원56전, 5월에는 29원49전이었다.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먼저 2월24일,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사는 교포의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 회원들이 ‘대한매일신보사’에 35원을 의연했다.

각각 독자적인 활동도 이어졌다. 한 달 뒤인 3월25일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회원인 김성무·임치정·이교담 등이 의연금 수전소를 ‘공립신보사(共立新報社)’로 정한 후 ‘국채보상 의연 발기서’를 발표했다.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도 만분의 일일지언정 당연히 도와야 하는 바, 이에 뜻을 모아 발기하니 미주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힘을 다하여 보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흘 뒤인 28일에는 로스앤젤레스 교포 박형모·남궁염·신봉희·염달욱 등이 ‘국채보상 취지서’를 통해 뜻을 밝혔다.

“외국에 나와 항상 애국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우리가 어찌 심상히 보고만 있겠는가? 이에 널리 알리니 형제자매는 보잘것없는 힘이라도 함께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공립신보사’로 보낸 의연금을 신문에 게재하여 알릴 것과, 의연금이 모두 수합될 때까지 은행에 임시로 예치하였다가 국내로 송금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의연금에 대한 사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황사용·강영대·신봉희·염달욱 네 사람을 수전위원으로 위촉하였다.

뿐만 아니라 5월7일에는 하와이 등지의 교포 김성환 등이 34원을 의연하였고, 27일에는 부인들이 격려의 ‘의연서’를 보내왔다.

연해주 지역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성원이 쏟아졌다. 4월20일에 교포 36명이 국채보상금으로 거둔 55원을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내온 것이다. 더불어 해외에서의 고된 생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놓지 않고 있는 고국에 대한 애틋함을 글로 적어 함께 보내왔는데, 구구절절 얼마나 절실하고 격렬한지 읽는 이마다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의 뜨거운 불길은 머나먼 바다를 거치는 동안에도 꺼지기는커녕 외려 더 활활 타올랐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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