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34] 문경 쌍룡구곡...고산·유수·청풍·명월 ‘四友’ 벗삼아…안빈낙도를 꿈꾼 민우식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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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29 07:59  |  수정 2021-07-06 14:35  |  발행일 2018-11-29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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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룡구곡 중 사우정이 있는 3곡 우연(于淵) 주변 풍경. 네 벗인 사우(四友)는 고산(高山), 유수(流水), 명월(明月), 청풍(淸風)이다. ‘고산유수’ ‘명월청풍’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쌍룡구곡(雙龍九曲)은 화운(華雲) 민우식(1885~1973)이 문경시 농암면 쌍룡계곡에 설정해 경영했던 구곡이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며 유유자적한 삶 속에서 학문에 힘썼다. 민우식은 상주 율리(栗里)에서 문경 화산(華山) 아래에 옮겨 살았다. 이때 그의 부친 민영석을 위해 쌍룡천의 용강(龍崗) 위에 사우정(四友亭)을 세우고, 내서천과 쌍룡천에 걸쳐 구곡을 설정했다. 쌍룡구곡은 다른 구곡과 달리 한 시내에 순차적으로 구곡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두 시내에 아홉 굽이를 나누어 설정했다. 1곡에서 6곡까지는 쌍룡천에, 나머지는 내서천에 설정했다.

쌍룡구곡은 1곡 입문(入門), 2곡 지도석(志道石), 3곡 우연(于淵), 4곡 여천대(戾天臺), 5곡 방화동(放化洞), 6곡 안도석(安道石), 7곡 낙경대(樂耕臺), 8곡 광명암(廣明巖), 9곡 홍류동(紅流洞)이다. 아홉 굽이의 이 명칭들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민우식은 ‘서쌍룡구곡시후(書雙龍九曲詩後)’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입문은 도의 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도는 도에 뜻을 두는 것을 말한다. 우연과 여천은 솔성(率性)을 말한다. 방화는 대인이고 저절로 변화함을 말한다. 안도는 도에 편안함을 말한다. 이 여섯 굽이는 공부의 진덕차제(進德次第)로 건괘(乾卦)의 초구(初九)인 잠룡물용(潛龍勿用)의 상(象)이고, 정자(程子)가 말한 회양사시(晦養俟時)다. 낙경이라 말한 것은 안빈낙도이니 곧 건괘의 구이(九二)로 현룡재전(見龍在田)의 상(象)이고, 대순(大舜)이 밭 갈고 고기 잡는 때이다. 광명이라 말한 것은 천하에 명덕(明德)을 넓히는 것을 말하니, 곧 건괘의 구사(九四)와 구오(九五) 상(象)이다. 홍류가 말한 것은 세상을 피하는 도원을 말하니, 건괘의 상구(上九)로 퇴손무회(退遜無悔)의 뜻이다. 이 세 굽이는 출처행장으로 말한 것이다.’

관직 나가지 않고 유유자적한 삶
농암면 쌍룡계곡 두 시내에 설정
1∼6곡 쌍룡천…7∼9곡 내서천
父 위해 3곡엔 ‘사우정’도 세워

민우식의 구곡은 이처럼 그가 지향하는 도의 세계에 나아가는 입도차제(入道次第)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도는 물론 유가(儒家)의 성현들이 추구했던 도다. 민우식의 ‘쌍룡구곡시’를 따라 가본다.

◆민우식이 20세기에 설정한 구곡

‘한 폭의 용강에 사우정이 자리하는데/ 세 산이 모이고 두 시내 돌아 흘러가네/ 이 땅의 산과 시내 아홉 굽이를 감추니/ 하늘이 경치를 가장 아름답게 하였네.’

이 시에서 나타나듯이 사우정은 세 산(道藏山, 佛日山, 靑華山)이 모이고 내서천과 쌍룡천이 만나는 쌍룡의 용강에 세워진 작은 정자이다. 사우는 고산(高山), 유수(流水), 청풍(淸風), 명월(明月)이다.

1곡 입문은 사우정이 있는 곳에서 시내를 따라 500m 정도 내려간 지점이다. 내서천과 쌍룡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쌍룡구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 형세를 띠고 있다.

‘일곡이라 이로부터 도의 문에 들어가니/ 양쪽에 높은 절벽 가는 길 어두워라/ 가다가 서면서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으니/ 차례로 나아가면 앞에는 절로 원두 있으리.’

1곡에서 도의 문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어둡고 험한 길이지만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으면 목적지인, 선비가 지향하는 도가 전개되는 극처에 도달할 것임을 노래하고 있다.

2곡 지도석은 내서2교가 놓여있는 지점이다. 다리 공사 과정에서 파괴된 것인지 지도석은 남아있지 않다. 높이 5m, 둘레 10m 정도의 바위로 ‘지도(志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곡이라 가파르게 솟아있는 지도석/ 횡류를 막아서니 진실로 주춧돌 같네/ 나는 물줄기 힘찬 폭포수 때로 지나는데/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니 더욱 희네.’

3곡은 우연이다. 사우정이 있는 바위 아래 물굽이다. 용강 바위 아래의 못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주변 풍광이 정자와 어우러져 멋지다. 정자에는 ‘명월청풍’과 ‘고산유수’ 주련이 걸려있다. 민우식이 이곳에서 함께했던 네 가지 벗이다.

‘삼곡이라 우연은 물결이 거울같이 잔잔하고/ 천연의 오래된 돌들 저절로 움집을 이루네/ 물결은 쉬고 바람도 없는 따뜻한 봄날/ 못에는 고기떼 이리저리 한가로이 노니네.’

잔잔한 물결, 따스한 봄볕, 한가로이 노니는 물고기를 보며 천지의 이치를 깨우친다.

4곡은 여천대다. 우연에서 물길을 따라 거슬러 2㎞ 정도 올라가면 시내 오른쪽에 높이 솟은 산을 만난다. 이 산이 여천대다. ‘하늘에 이르다’는 의미를 가진 여천은 산의 형상을 뜻한다. 여기서는 다른 의미도 갖는데, ‘시경’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鳶飛戾天)/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논다(魚躍于淵).’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어노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고, 이러한 것이 천지자연에 내재하는 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곡이라 하늘에 이르는 높은 누대(四曲戾天千尺臺)/ 일찍이 높은 이곳 이르는 이 없어라(無人曾昔到崔嵬)/ 둥지 튼 솔개만 그 본성을 알아(惟有巢鳶能識性)/ 긴 바람 타고 구만리 날아 휘도네(長風九萬任飛回).’

5곡 방화동은 4곡에서 물길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다 작은 길을 따라 산속으로 1㎞ 정도 들어가면 나온다. 얼마 전까지 10여 가구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는 마을이다.

‘오곡이라 초연히 방화동이 자리하는데(五曲超然放化洞)/ 가려 뽑은 곳 무리에서 우뚝하네(拔乎其萃出乎衆)/ 몇 사람 이곳에 이르렀는가(屈指幾人能到斯)/ 하늘 땅 고요하니 긴 꿈에 취하리라(乾坤寂寂醉長夢).’

6곡 안도석은 5곡 방화동 입구에서 계곡 물길 따라 3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높다란 바위산에 이른다. 위에 소나무가 있는 양파 모양의 이 산이 안도석이다. 멀리서도 잘 보인다. 주변 풍광이 매우 좋은 곳이다. 안도석 앞의 용추계곡은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계곡다운 계곡이다.

‘육곡이라 저 멀리 안도석이 자리하는데(六曲迂然安道石)/ 시내 중류에 우뚝 솟아 있네(中流截特百千尺)/ 지금 높아 오르지 못한다 말하지 마라(休說而今高莫攀)/ 문을 통해 나가면 도를 찾을 수 있으리(由門進道可追跡).’

도에 이르는 길에서 포기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7곡 낙경대는 내서천에 있다. 농암면 내서리 쌍룡교에서 1㎞ 정도 내서천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에 소나무들이 있는 작은 숲이 있는데 이곳이 낙경대다. 이 굽이 너머에는 밭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낙경’은 즐겁게 밭을 간다는 의미다. 이 굽이에서는 밭을 가는 평범한 삶 속에 참다운 도가 있음을 노래한다.

‘칠곡이라 몸소 밭 갈며 이 대에서 즐기니(七曲躬耕樂此臺)/ 감나무 뽕나무 콩 비가 오자 가꾸었네(枾桑豆菽雨初裁)/ 남산에서 김매고 돌아와 저녁에 누우니(鋤罷南山歸臥夕)/ 아이들 둘러앉아 책 읽기 재촉하네(兒孫環匣讀書催).’

8곡은 광명암은 7곡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길옆에 보이는 검은 빛깔의 바위를 말한다. 초서체로 ‘광명암(廣明巖)’이라 새겨져 있다. 그 옆에 해서체로 ‘쌍계수석(雙溪水石)’ ‘사우산림(四友山林)’이 새겨져 있다.

‘팔곡이라 기이한 바위는 넓고 밝으니(八曲奇巖廣且明)/ 맑은 물 뛰는 물고기 서로 정답네(水澄魚躍兩相情)/ 바람 구름 고기 물은 진실로 우연이 아니니(風雲魚水誠非偶)/ 나의 명철 넓혀 가서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推廣吾明利衆生).’

9곡 홍류동은 8곡에서 1㎞ 정도 거슬러 올라간 지점의 바위 계곡이다. 원래 지명이 홍골인데, 민우식은 이 굽이를 홍류동이라 명명했다.

‘구곡이라 홍류에는 별천지 동천이 있는데/ 도화와 봄물에 세상 근심 이르지 않네/ 아침에 산굴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니/ 길짐승에 기린 있고 날짐승에 봉황 있네.’

마지막 9곡 홍류동에서 도가 구현되는 별천지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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