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3> 신분을 초월한 의연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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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27   |  발행일 2018-11-27 제13면   |  수정 2021-06-22 18:01
망국의 위기에 걸인도 구걸한 돈 의연금에 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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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임금부터 관료, 부자, 선비, 시장 상인, 학생, 백정, 걸인까지 신분을 초월한 의연행렬이 줄을 이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당시 국민들의 의연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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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에 장애가 있는 앉은뱅이 걸인도 구걸한 돈을 국채를 갚는 데 보태라며 내놔 주변을 놀라게 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의연에 참여한 걸인의 모습을 재현해 그때의 감동을 전하고 있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언론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마른 들판에 불꽃 번지듯 무서운 속도로 전국에 확산됐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조직을 구성했고, 의연금을 모으기 위해 모두가 열정적으로 나섰다. 망국의 위기 앞에서 고작 3개월간의 단연(斷煙)이라는 간편하고 간단한 일도 못하겠는가 하는 공감대의 형성이었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3편은 임금부터 관료, 부자, 선비, 시장 상인, 학생, 백정, 걸인까지 신분을 초월해 의연에 나선 이야기다.

#1. 국권회복에 너도 나도 힘을 보태니

국채보상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대구의 열기는 초기부터 끓어올랐다. 즉각적이면서 뜨거운 반응을 보인 곳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인 시장이었다. 대구군민대회가 열렸던 1907년 2월21일로부터 사흘 뒤인 24일 짚신장수, 콩나물장수, 술장수, 밥장수, 떡장수 등 서문시장의 영세 상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주머니를 열었다. 50~60전에서부터 1~2원에 이르기까지 애써 번 돈을 나라빚을 갚기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들의 얼굴에선 결기마저 흘렀다. 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추이를 지켜보기만 하던 선비들과 유지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식과 학행이 있은들 무엇하겠습니까. 실로 부끄럽습니다. 우리도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던 2월26일이었다. 고종 황제가 칙어(勅語)를 내렸다.

“우리 국민들이 국채를 보상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단연하고, 그 값을 모은다 하거늘 짐이 어찌 담배를 피우겠는가. 짐 또한 단연하겠다. 아울러 국채보상운동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영친왕(英親王)의 길례(吉禮, 가례)를 연기하도록 하겠다.”

칙어가 무엇인가. 임금이나 황제가 몸소 나서서 전하는 말 아닌가. 그런 점에서 그날의 칙어에는 단연보상(斷煙報償)에 대한 고종의 절절한 진심이 배어 있었다.

이 소식은 당시 국채보상운동에 냉소적인 입장을 보이던 정부 대신들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참정대신을 지낸 김성근(金聲根)이 100원을 의연한 것을 필두로 고위관료들이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러한 사실을 신문에 그대로 게재했고 이는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 신분을 초월한 애국심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는 나이, 성별, 신분, 지위 등을 모두 초월했다. 일선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관립영어학교’에서 교장, 학생, 사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전체가 뜻을 한데 모아 동맹했고, ‘시종무관부(侍從武官府)’의 사환병 30명 또한 단연 동맹 후 6원20전의 의연금을 모아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내왔다.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의 교성대(敎成隊) 81명은 45원52전5리의 성금을 모아 보내왔는데, 그중에서 1등과 2등으로 졸업한 하영수와 한용학은 한 달치 월급을 모두 내놓아 귀감이 됐다.

하층민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서울의 한 양반집에서 잡일과 궂은일을 맡아하던 이들이 품으로 받은 삯 전부를 내놓은데 이어 한 노복은 단주까지 결심하면서 5원을 보내왔다. 더불어 서울에서 인력거를 모는 인부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북촌의 한 인력거꾼은 4원을, 생선전의 인력거꾼인 장승관 등 23명은 5원75전을, 서십자각 병문의 인력거꾼 17명은 3원40전을 의연금으로 전달했다. 특히 유해종이라는 82세의 노인은 병중에 짚신을 삼아 판 돈으로 비지를 사서 아내와 함께 근근이 연명하고 있으면서도 2원을 기성회에 보내와 마음을 울렸다. 뿐만 아니었다. 속속 답지된 의연금에는 아이들의 세뱃돈, 고아원 학도들의 심부름값 등도 포함돼 있었다.

들불의 진원지인 대구는 보다 더 활발했다. 1907년 3월9일 대구민의소는 대구 서문 밖의 수창사(壽昌社)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고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이때 의연 행렬이 끊이지 않고 연일 줄을 이었다. 무리 중에는 행상은 물론 심지어 걸인까지도 있었다.

‘국채보상 단연금(斷煙金) 모집설명회’ 때는 더 분위기가 고조됐다. 당시 대구 지역의 단연회 관계자들은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한 책임을 다하려면 경상북도가 다른 지역보다 모범적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국채보상도총회(慶北國債報償道總會)’를 결성했다.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대구 최고의 거부 서상돈이 총무장이 되어 실무를 지휘한 ‘경북국채보상도총회’가 개최한 행사가 바로 ‘국채보상 단연금(斷煙金) 모집설명회’였다.

설명회 당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몇 십원, 몇 십전을 바치는 가운데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20원을 바친 백정 김창녕(金昌寧)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엽전 5냥을 바친 걸인이었다. 특히 두발에 장애가 있는 앉은뱅이 걸인은 구걸한 돈을 의연금으로 내면서 담뱃대를 부러뜨려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를 곁에서 본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부녀들은 은가락지는 물론이고 품에 가지고 다니던 장도(粧刀)까지 함께 풀어서 내밀었다. 그리고 서상하(徐相夏)가 서문시장 장날을 맞이해 단연회 회장 등과 함께 단연을 동맹하는 뜻에 대해 연설하고 군중을 향해 큰절을 올렸을 때는 이에 감화받은 백정 김시복(金時福)이 10원을 의연하기도 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4월 30일 대구의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에서 서상돈 1천원, 정재학 400원을 비롯해 전(前) 군수, 전(前) 승지 등 벼슬을 지냈던 유지들이 각각 100원이라는 거금을 의연해 회비를 분담했다. 지도층 인사들의 솔선수범은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의 경우 무려 41개 군에 ‘국채보상의연금수합소’가 설치돼 있을 정도였다. 이는 황성신문에 실린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윤웅렬(尹雄烈) 소장이 7월9일 대구에 와서 경북 41개 군의 국채보상금수전소 소장을 소집해 연설하고 11일에 서울로 돌아갔다’라는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 전국의 마을들이 일어나다

1907년 8월까지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고 활동에 나선 전국의 단체는 100개 이상에 이르렀다. 모두 자발적인 참여였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핵심 요인이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은 도·군·면의 마을 단위로 전 계층에 걸쳐 전개됐다. 정부 관리에서부터 학생과 군인에 이르기까지 금연과 금주에 나섰고, 나아가 음식을 줄이는 이들도 이었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면서 나라 전체에서 미담사례가 이어졌다. 김천 지역의 계몽활동가인 이병재(李秉宰), 김안서(金安瑞), 김순서(金順瑞) 등은 국채보상회를 조직한 후 주민들의 동참을 간절하게 호소했다. 이들은 손자와 손녀를 포함한 온 가족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생계를 꾸려가는 일조차도 뒤로 미루었을 만큼 운동에 전념했다. 또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던 남보(南甫)라는 노파는 술을 팔아 5원이라는 거금을 의연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김천의 유지들로 구성된 단연회에서도 1차로 200원을 황성신문사에 기탁하고, 2차로 202원50전과 은반지 등을 기탁해 관심을 모았다.

충남 지역에서는 아산에서 훈훈한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과부 양소사(梁召史)가 처음으로 의연금을 내놓은 데 이어 둔포에 거주하는 일신소학교(日新小學校) 교직원과 학생들이 13원40전을 의연하고, 이서면의 문지사숙(文旨私塾)도 이에 동참했다. 특히 안봉삼(安鳳三)이라는 가난한 노동자의 의연은 감동적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의연 소식에 감동을 받은 터였다. 이에 일하고 받은 임금 80전을 아내에게 맡기고는 며칠 뒤 의연을 하기 위해 다시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내민 것은 80전이 아니라 거금 2원이었다. 그는 놀라며 “이리 큰돈이 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며 아내에게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내가 삭발한 후 머리카락을 팔아 보탠 금액이었다. 이 소식은 주위에 널리 알려졌고, 주민들의 동참을 유도하는 기폭제가 됐다.

황해도에서는 은율군(殷栗郡)의 홍진삼을 비롯한 주민들이 ‘국채보상 발기문’을 공포했고, 안악군(安岳郡)의 김응화 등도 취지문을 발표해 주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살림을 팔거나 머리카락을 팔아 의연에 동참하는 부인도 있었다.

평안도에서는 국채보상회를 조직한 임기반의 아내 최신실이 은장도를 내놓았다. 그녀가 한 말이 남편 임기반의 마음을 울렸다.

“모든 사람은 천부적인 자유와 국가적인 관념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부녀자도 의무를 실행해야 합니다.”

함경도 단천(端川)에서는 ‘국채보상가’를 지어 알림으로써 의연활동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그야말로 신분을 초월한 의연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 과정, 조항래. 대한제국기 경북 김천지역 계몽운동 전개와 성격, 김형목. 충남지방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양상과 성격, 김형목.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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