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1> 광문사에서 불꽃이 피어나다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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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3   |  발행일 2018-11-13 제13면   |  수정 2021-06-22 17:59
“2천만 국민 담뱃값 모아 국채 갚자” 국권회복 운동 첫 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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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수창초등학교 인근 광문사터. 국채보상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이 조성되어 있다. 광문사는 국민 힘으로 국채 1천300만원을 갚아야 한다고 처음 발의한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 광문사가 있었던 자리가 지금까지 알려진 수창초등 인근이 아닌 경상감영공원 인근 경상북도 관찰부 내 취고수청(吹鼓手廳)이라는 주장이 나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역사의 시작과 중심은 바로 대구다. 일제가 강제로 빚지게 한 국채 1천300만원을 갚기 위해 시작된 국권회복 운동으로, 1907년 1월29일 대구 광문사에서 첫 물꼬를 텄다. 

그해 2월21일 대구군민대회는 국채보상운동의 서막을 알리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됐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은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비롯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운동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일제의 핍박으로 끝내 좌절됐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1997년 IMF 환란 시기에는 금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대구의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 

과거의 역사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지금도 대구의 자부심이자 후손들에게 전해줄 미래자산이다. 이는 대구만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총 8회에 걸쳐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성과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구는 물론 전국을 무대로 펼쳐진 국채보상운동 스토리를 소개한다. 시리즈 1편은 국채보상운동의 물꼬를 튼 광문사에 대한 이야기다.


#1. 대한제국을 뒤덮은 먹구름

“차관이 필히 화를 초래하리라. 종내는 이 나라가 악의 손에 떨어지고야 말리라.”

차관(借款)이 무엇인가. 쉽게 한마디로 말하자면 빚,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들여오는 엄청난 규모의 빚이었다. 그런데 그 빚을 일제가 대한제국을 상대로 시도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려 식민지화를 앞당기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조정의 염려가 날로 자심해지고 백성의 근심 또한 커졌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차관을 도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차관 공여의 당사자인 일제는 이미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차관 공여를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었다.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원과 300만원의 차관을 성립시킨 것이다. 이러한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고문(顧問)을 파견해 간접통치를 시작하면서 더욱 노골화됐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대한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고자 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 건설을 위한 사전 준비의 일환이었다.


광문사 사장 김광제·부사장 서상돈
사내모임 광문사문회 특별회서 제안
회원 만장일치로 동참 2천여원 모아
1907년 대구민의소서 ‘단연회’ 구성
북후정에서 모금 위한 군민대회 개최



이에 따라 일제는 1905년에 대한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화폐정리채 300만원을, 채권 상환 등을 이유로 200만원의 차관을 연이어 들이도록 한 데 이어 화폐개혁에서 비롯된 금융공황을 구제한다는 명분 아래 150만원을 또 들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906년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부터는 교육제도의 개선과 금융기관의 확장정리 등 갖은 명목을 동원해 무려 1천만원에 달하는 고이율의 차관 도입을 강요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1906년까지 고작 2년여 사이에 원금 1천650만원에 달하는 채무와 해마다 늘어나는 상당한 액수의 이자를 떠안게 되었다. 비록 1907년 2월에 약 350만원을 정리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1천300만원(현재기준 약 3천100억원)의 국채는 당시의 국가 재정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액수였다. 실제로 1천300만원은 대한제국의 1906년 1년치 예산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그야말로 나라 땅 전체를 일본에게 빼앗기게 될 절박한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바람 앞에 등불이 따로 없었다. 대한제국의 백성으로서는 차관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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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사터 표지석. 표지석에는 ‘국채보상운동 발상지’라는 글귀와 ‘2년여 동안 불타오른 국채보상운동의 첫 물길’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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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의 두 주역 김광제(왼쪽)와 서상돈.
#2. 대구에서 피어난 불꽃 

 

1907년 1월29일,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에 굳은 표정의 인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광문사는 대구·경북지역의 지식인, 자산가, 관료 등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출판사 겸 인쇄소였다. 각종 실학서에 대한 저술과 발간, 도내 각 학교에 사용될 교과서 출간, ‘월남망국사’를 비롯한 각국 망국사 편찬 등이 핵심 업무였다. 아울러 광문사는 신학문을 도입하여 자강의식을 일깨우는 데도 앞장섰다. 특히 사내에 ‘광문사문회(廣文社文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독서와 시작(詩作) 교육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 또한 전개하던 선각단체였다. 이날은 광문사문회를 대동광문회로 확대하고 그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특별회가 열리던 터였다.

“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내주어야 함은 불을 보듯 뻔한 일. 두 눈 뜨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1866~1920)였다. 경무관이던 김광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가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장악하면서 사표를 낸 인물이었다. 일제가 조선왕궁에 대한 경비마저 도맡으려 한 데 대한 비분강개 차원이었다. 아울러 고종황제 앞으로 ‘친일배와 내정부패를 탄핵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조정으로부터 미움을 사 고군산도로 유배를 다녀오기까지 한 터였다. 그리고 1907년 초에 대구로 돌아와 건립한 것이 바로 광문사였다.

김광제의 발언을 들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 힘으로 국채 1천300만원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겁니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단 석 달 동안만 끊어도 그 대금이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으면 됩니다.”

서상돈(1850~1913)은 1866년에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대구로 피난해온 이였다. 엄청난 핍박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첫 천주교 신부였던 김보록을 통해 신앙을 굳건히 유지해온 그는 엄청난 부자이기도 했다. 천주교회를 통해 알게 된 인맥을 이용해 중국 등지와 상거래를 터 상당한 부를 축적한 때문이었다. 그는 1871년부터 지물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해 불과 15년 뒤인 1886년에 대구의 재벌로 꼽히고 있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으로 활약하고 있기도 했다. 서상돈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나부터 의연금으로 800원을 내놓겠소.”

여기저기서 찬성의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좋은 생각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함께 참석해 있던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가운데, 사장 김광제가 국채보상발기회 연설을 시작했다.

“금일(今日) 문제(問題) 국채(國債)의 보상(報償)이로 본사(本社)에서 발기(發起)니, 본사(本社)의 형편(形便)부터 강 설명(說明)하고 본사(本社)를 광문사(廣文社)라 명칭(名稱)야. 설립(設立)든 초두사기(初頭事機)를 방청제위(傍聽諸位)가 다 목도이문(目睹耳聞)한 바 …중략… 제일패망(第一敗亡)할 와 제일시급(第一時急)한 바 일천삼백만원(一千三百萬圓)의 국채(國債)올시다. …중략… 발기자 본사장(本社長) 김광제(金光濟), 부사장(副社長) 서상돈(書相敦)으로 자서(自書)하오리다. 본인(本人)부터 흡연(吸煙)의 제구(諸具)를 만장제군전(滿場諸君前)에 파쇄(破碎)오며 오등(吾等)의 토지(土地)와 신체(身體)가 전집중(典執中)에 현재(現在)한지라. 보상(報償)면 속토속신(贖土贖身)할 것이오, 미보(未報)면서 여(予)하고도 무죄(無罪)한 이 몸이 인(人)의 노예(奴隷)되리로다. 황천(皇天)이 감응(感應)여 전국인민(全國人民)으로 일심합력(一心合力)야 대사(大事)를 순성(順成)고 민국(民國)을 보존(保存)케 하옵소서.”

연설을 마친 김광제는 “휘한허희(揮汗噓晞)고 하담이퇴와(下坍而頹臥)니라”하고는 자신의 담뱃대와 담뱃갑을 버렸다.

“미룰 것 없습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시작합시다. 일단 나부터 석 달 동안의 담뱃값 60전에 10원의 의연금을 별도로 내겠소.”

김광제의 의연에 이어 다른 회원들도 스스로 동참했고, 순식간에 2천여원이 모였다. 당시 신문 한 달 구독료가 30전, 주사 월급이 15원, 쌀 한말이 1원80전이던 것을 비교하면 이날 모인 금액은 거액이나 다름없었다.

#3. 불꽃이 곧 들불로 일어나기를

그로부터 20여일 지난 1907년 2월21일, 대동광문회의 총회 날이었다. 김광제와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을 중심으로 한 회원들이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 대구상공회의소의 모태)에 한데 모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단연회가 구성되었다. 말 그대로 ‘끊을 단(斷)’과 ‘연기 연(煙)’, 담배를 끊어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이었다. 단연회 설립과 동시에 이 자리에서도 500원이 모금되었다. 이어 이들은 대구 북후정(北亭)에서 국채보상운동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했다.

2월 말의 날카로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디틈 없이 군중이 응집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직업 또한 다양했으며, 개 중에는 골목에서 제기 차며 놀던 아이까지도 끼어있었다. 호응 또한 열렬한 가운데 ‘국채보상운동 취지서’가 낭독됐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백성과 나라가 위급한 때이거늘, 결심도 계획도 없이 다만 팔짱끼고 우두커니 앉아서 멸망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나라가 망하면 민족도 따라서 진멸됨이 당연한 터. 그런데도 제 몸과 제 집이 있는 것만을 알고 임금과 나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져 멸망하는 길입니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충의를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국채 일천삼백만원이 있은즉, 우리 대한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갚으면 나라는 보존될 것이나,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 지금의 국고로는 변제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2천만 민중이 석 달을 정하여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각 사람으로부터 매월 20전씩 거둔다면 충분히 모을 수 있습니다. 우리 2천만 국민 가운데 털끝만큼이라도 애국사상이 있는 이라면, 이에 대해 두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대한 신민 여러분은 이를 곧 말과 글로 서로에게 알리어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십시오. 이로써 강토가 유지된다면 이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광무 11년 2월21일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불꽃을 들불로 일으킬 거대한 바람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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