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지식의 장님과 귀머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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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2 07:48  |  수정 2018-11-12 07:48  |  발행일 2018-11-12 제17면

장자 ‘소요유’ 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님에겐 빛깔의 아름다움이 안 보이고, 귀머거리에겐 음악의 황홀한 가락이 안 들리지만,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비단 육체에만 한정되는 게 아닐세. 지식에도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네.’

견오(肩吾)라는 사람이 연숙(連叔)에게 막고야(姑射) 산의 신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피부는 얼음이나 눈처럼 희고, 몸매는 처녀같이 부드러우며, 곡식을 먹지 않고 바람과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천지 밖에서 노닌다네. 정신이 한데 집중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병들지 않고 곡식도 잘 익는다는 거야. 이야기가 허황돼서 믿어지지가 않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연숙은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견오를 장님과 귀머거리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바로 그런 장님과 귀머거리이다. 그들은 좁게 칸막이를 친 자신의 전문분야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지만 칸막이 너머의 큰 지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큰 지혜는 무아(無我)를 근본으로 한다. 장자는 “지인에게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至人无己), 신인에게는 공적이 없으며(神人无功), 성인에게는 이름이 없다(聖人无名)”고 하였다. 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전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하다. 이를 불교에서는 정등각(正等覺)이라고 한다. 나라고 불리는 것과 너라고 불리는 것, 혹은 인간과 동·식물이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나라고 불리는 것과 코를 푼 휴지, 똥, 오줌이 모두 평등하다. 심지어 나와 원자폭탄과 방사능이 평등하다. 이것이 큰 지혜다. 마음이 곧 경계이기 때문에 큰 지혜는 마음과 경계, 그리고 그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때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 큰 지혜는 마음을 떠나야 드러나기 시작한다. 큰 지혜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마음이 없을 때 문득 우리는 큰 지혜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큰 지혜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아무리 지켜보아도 큰 지혜는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의 바탕이 드러나도록 조건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마음공부는 마음을 떠나야 한다. 마음공부를 한다고 결가부좌하고 앉아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마음공부에 대해 ‘어떻게?’라고 질문해서도 안 된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이미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자리는 어느 순간 조건이 갖춰지면 저절로 드러난다. ‘나’라고 주장하는 것을 버리고 삶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 마치 선물처럼 그것이 드러난다. 삶의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갈아타면 비로소 그 자리가 보인다. 장자는 이를 ‘알지 못하는 바에 머무는 것(止其所不知)’이라고 했다. 큰 지혜를 얻기 위한 마음공부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조건을 갖춰 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무아와 평등을 근본으로 하는 탈현대의 지식은 막고야 산의 신인과 같다. 현대인은 이런 탈현대 지식을 들으면 허황된 이야기로 여기며 크게 웃을지도 모른다. 노자(老子)의 말대로 어리석은 현대인이 크게 웃지 않으면 탈현대 지식이 아니다. 탈현대의 교육은 장님과 귀머거리인 현대의 지식이 아니라 무아와 무아를 통한 평등을 깨닫는 큰 지혜를 가르치는 데서 시작된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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