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13·(끝)] 효행의 상징 전좌명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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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8   |  발행일 2018-10-18 제14면   |  수정 2018-10-18
부모 제사에 쓸 향합 못찾아 통곡하니 흰 까마귀가 물어다 줬다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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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무을면 무이리에는 전좌명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전좌명은 성종임금이 효행을 칭찬하며 어제시판을 내릴 만큼 효자로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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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좌명의 정려비각에는 정려비와 함께 ‘孝子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行廣興倉主簿田佐命之閭’라고 새긴 편액이 걸려있다.

구미 출신인 전좌명은 효행의 상징으로 손꼽힌다.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가 병상에 누운 7년 동안 몸소 약을 달이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결국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자 곧장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 중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합장하고 여막살이를 이어갔다. 이후 상기(喪期)를 마쳤는데도 전좌명은 부모의 묘소를 떠나지 않았고 무려 6년동안 시묘살이를 해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특히 그는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이면 반드시 부모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향을 보관하는 제기인 향합(香盒)이 보이지 않자 자신의 정성을 탓하며 한탄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흰 까마귀인 백오(白烏)가 향합을 물고와 정성껏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 소문이 조정에도 알려져 정려가 내려지고 특히 성종은 전좌명의 효행을 칭찬하며 어제시판(御製詩板)을 하사했다. 그의 정려비는 구미시 무을면 무이리에 있다.


성인들도 벅찬 사서삼경 열살에 통달
아버지가 과거 권했지만 정중히 사양
어머니 대소변 받아내며 병수발 7년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 6년
조정까지 효행 소문…붉은 문 세워져
전좌명 사후 40년엔 성종이 시판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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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좌명의 정려비 주위에는 추모비와 기적비, 묘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1. 나이가 어리다고 학문도 어리랴

구미 무을면 무이리의 소박하게 작은 집은 오늘도 조심스러웠다.

“좌명아.”

“예.”

“방해해도 되겠느냐?”

“방해라니요.”

좌명이 벌떡 일어나서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바깥의 햇살이 좁디좁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더불어 부모의 목소리도 함께 묻어 들어왔다.

“여전히 그러고 있는 게냐?”

“예.”

부모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볕 좋은 한낮이니만큼 밖에서 볕바라기라도 좀 하면 좋으련만, 방 안에 틀어박혀 책만 붙들고 있는 아들이 염려스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까닭이었다. 부모가 말을 이었다.

“우리 생각에 말이다. 네 학문이 도달한 바가 성인의 수준을 능가하니 문과에 응시해보는 게 어떨까 한다.”

전좌명은 아직 열 살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해 있었다. 사서란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을 이르는 말이다. 모두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 일반 성인도 꿰뚫기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도 그 실력이 하늘에 닿고 있으니 입신양명도 능히 꿈꾸어봄 직하다는 것이 부모님의 의견이었다. 이에 좌명이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하나 소자, 세상이 주는 권력과 명예를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닦는 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전좌명의 부모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식이기는 해도 존중해야 할 뜻임에 분명했다. 그날 이후로 전좌명의 부모는 아들이 이루고 있는 학문과 아들이 꿈꾸고 있는 미래에 대해 일절 참견도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뛰어난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부모의 최선이라 여긴 것이다.

#2. 하늘이 알아보고 도운 효심

전좌명은 머리가 명석한 만큼, 마음 그릇도 크고 깊었다. 무엇보다도 효성이 지극했다. 자신으로 인해 마음에 그늘이 질까 늘 부모의 안색을 살폈고, 집안을 꾸리는 데 무리가 있을까 항시 부모의 일상을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그만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약도 잘 듣지 않는 병이 깊고 깊어지더니 결국엔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전좌명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병구완에 성심을 다했다.

우선은 혹여 차도가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용한 의원을 수소문해 직접 약을 달여 드시게끔 했다. 아울러 늘 누워만 있다 보면 살갗에 탈이 난다기에 자리가 질어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챙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대·소변도 다 처리했다. 그러는 틈틈이 차고 깨끗한 물에 목욕재계하고 어머니의 회복을 하늘에 빌었다. 그런 생활이 7년이나 흘렀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가운데 전좌명은 어머니의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곧이어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것이다. 이에 전좌명은 어머니 곁에 아버지를 합장하고 눈물겨운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상을 벗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그런데도 전좌명은 부모님의 묘소 곁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그러자 고을 사람들이 찾아왔다.

“상을 다 마쳤습니다. 이제 그만 내려오시지요.”

“세상의 법은 시간이 다 되었다 하나, 내 마음의 법은 아직 한참 부족하오.”

“벌써 몇 년째십니까? 그러다 공께서 상하십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고집 부리실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더 있을 겁니다.”

더는 말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전좌명의 곡이 이어졌다. 전좌명은 그렇게 부모님 곁에서 무려 6년을 지내고서야 세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전좌명은 이후로도 삭망(朔望), 즉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이면 반드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정성껏 제상을 준비하는데, 아무리 찾고 뒤져도 향합(香盒)이 보이지 않았다. 향합이란 제사에 쓰는 향을 보관하는 제기였다.

“나는 자식도 아니다. 정성이 부족하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니더냐.”

자책감과 죄책감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하여 엎드려 통곡하고 있자니 어디서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백오(白烏)였다.

“흰 까마귀라니. 상서롭구나.”

그런데 까마귀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전좌명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동안 까마귀가 조심스럽게 날아와선 전좌명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고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가 그 무언가의 실체를 확인한 전좌명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것은 향합 아니냐.”

그랬다. 바로 전좌명을 울게 만든 바로 그 향합이었다. 전좌명이 그 향을 피우고 제를 정성껏 지냈음은 물론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세상 사람들이 한입으로 말했다.

“하늘이 감동했다고 할 밖에.”

“얼마나 지극했으면 하늘이 도왔을꼬.”

이 이야기는 세상을 돌고 돌아 궐 안까지 닿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감복한 이들 중에는 관리도 있었다. 1432년(세종 14) 9월, 예조에서 왕에게 아뢰었다.

“선산 사람 전좌명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온몸을 쓰지 못하고 병상에 누운 기간이 무려 7년인데, 그 시간 동안 직접 약을 달이고 몸소 오줌 그릇을 받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죽고 곧이어 아버지까지 세상을 뜬 바, 부모를 합장하고 여막에 살았으며, 상기를 마치고도 떠나지 못한 채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오니 타의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했으면 좋겠느냐?”

“정문을 세우고 벼슬을 내림이 마땅할 줄 아옵니다.”

정문(旌門)이란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하여 그들의 집 앞에 세워주던 붉은 문을 이른다.

“그리 하도록 하라.”

왕이 허하였다.

#3. 복이 임하니, 천수를 누리다

전좌명의 효심에 대한 이야기는 두루두루 귀감이 되고도 남았다. 전좌명이 104세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뜨고 나서도 잊히지 않았을 정도였다. 실제로 전좌명이 죽고 40년이 흐른 1472년(성종 3) 여름, 예조에서 아뢰었다.

“전좌명이 그 어버이에게 지극히 효도한 바, 살아서 봉양함과 죽어서 장사지내는 데에 그 정성과 공경함을 다하였기에 그의 고을이 칭찬하고 사모합니다. 하나 지금은 죽고 없으니 그 뜻이 사라지지 않도록 도우소서.”

성종은 반색했다. 전좌명은 성종의 왕비인 정현왕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까닭이었다. 이에 성종이 전좌명의 효행을 칭찬하며 어제시판(御製詩板)을 내렸다.

白烏御含香盒南山代田民(백오어함향합남산대전민)

흰 까마귀가 향합을 물어오니 남산이 백성을 대신하는구나.

남산이 ‘앞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느니 만큼, 흰 까마귀가 향합을 물고 전좌명을 향해 날아온 그 정경을 전민(田民, 농민), 즉 백성들을 대신해 앞의 산이 목격하고 그 거룩한 효심을 증명한다는 뜻이라 하겠다.

아울러 정갈한 비석도 세워졌다. 비의 앞면에는 ‘孝子贈右議政田佐命之閭(효자증우의정전좌명지려)’를 새겼고, 편액에는 ‘孝子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行廣興倉主簿田佐命之閭(효자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행광흥창주부전좌명지려)’를 새겼다. 두 경우 다 ‘효자’를 앞에 둠으로써 전좌명의 효심을 강조했다. 널리 알려 세상의 모범으로 삼아 본받게 하려 함이었다. 비석과 편액은 현재 연안전씨(延安田氏) 집성촌인 구미 무을면 무이리 동구의 비각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선산의 맥락, 디지털구미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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