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9] 독립운동가 윤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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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7   |  발행일 2018-10-17 제12면   |  수정 2018-10-17
학생만세운동 지도부 활약‘독립만세제창 주도’…일왕 살해 의거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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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영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윤자영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해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 제창을 주도하다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그의 필명은 소야, 윤소야(尹蘇野), 소야(笑也) 또는 ‘SY’였다. 일제의 자료에 기록돼 있는 별명은 윤석한(尹石漢 또는 尹錫漢), 호는 불가살(不可殺)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된 이력서에는 정일영(丁一英), 러시아에서는 ‘Yun, Za Yen’ 혹은 ‘Chen Min’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약관의 나이에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이끌었고 이후 고려공산당과 임시정부, 그리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약하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 그의 본명은 윤자영(尹滋瑛)이다.

3·1운동 일어나자 학생에 독립선언서 배포
보안법 등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서 옥고
출옥후 조선청년회연합회 상무위원 선임
서울청년회 기관지‘아성’편집위원으로 활약

상하이 자리잡은 후 임시정부 의회활동 참여
일경 추적 받으면서도 ‘청년동맹회’ 조직
1926년 만주로 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설치
반당분자 논문소지 혐의로 러시아서 처형


#1. 청송 출신 윤자영

윤자영은 1894년 9월13일(1896년 출생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판결문, 제적등본, 수형기록카드 등의 기록을 따랐다), 경북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 749에서 태어났다. 근래에 만들어진 족보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장(兼五衛將)을 지낸 윤계원(尹啓遠)이며, 부친은 의금부도사를 지낸 윤만박(尹晩)이다.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관직을 이어왔다고 전하며 중소지주 정도의 가세를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세를 전후해 서울로 올라가 경성공업전습소(서울대 공대의 전신) 도기과(陶器科)를 다녔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중단했다. 1917년 무렵에는 이미 안동시 옥동에 거주하던 안동권씨 권필향(權苾香)과 결혼한 상태였으며 1919년에는 서울대 법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당시 만 25세의 나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해 1월은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온 나라가 술렁이고 있었다. 종교지도자들이 분주하게 회합을 가졌고, 각 학교 학생대표들도 날마다 구수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거대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윤자영은 경성전수학교 대표이자 학생만세운동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종로에서 시위와 독립만세 제창을 주도했다. 그는 일경에 체포되었고,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사회혁명당

출옥 후 윤자영은 곧바로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7월, 당시 서울에 있던 70여 청년모임을 하나로 묶은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윤자영은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 1921년 1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이끌어가기 위한 구심체로 ‘서울청년회’를 조직했다. 그는 서울청년회 기관지 ‘아성’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하며 많은 글을 썼다. 그때 그의 필명이 ‘소야’다. 동시에 그는 전국을 다니며 강연회를 벌였다. 강연의 주제는 ‘배재학생선후책에 대하여’ ‘개조운동의 선구자’ ‘청년운동의 제일보(第一步)’ 등이었다. 그는 3·1운동 이후 사회 개조를 이끌어갈 에너지가 청년에게 있다고 여겼다. 당시 신문은 그의 강연에 대해 ‘도도한 웅변을 시(試)하여 일반 청중에게 막대한 자극을 주고 갈채 속에 10시 반경 폐회하였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출옥 직후인 1920년 6월 윤자영은 서울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사회혁명당’에 가입하면서 사회주의에 입문했다. 그리고 1921년 3월에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효시인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석해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5월 사회혁명당은 러시아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과 연합해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는데 윤자영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이들은 같은 시기에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과 구별하기 위해 상하이파라 부른다. 윤자영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간부로 선임되었으며 기관지 편집에도 참여했다.

#3. 망명, 고려공산당과 청년동맹회

국내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1년 말을 전후해 국외로 망명했다. 1922년 10월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통합을 위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가 러시아에서 열렸다. 그는 상하이파 소속 마산지역 대표라는 직함으로 참가해 의장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대회는 결국 통합을 이뤄내지는 못했다. 대회가 끝난 뒤 윤자영은 대표 자격으로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공산주의 국제연합) 본부로 파견되었다. 코민테른은 고려공산당 양파의 해체를 선언하고 꼬르뷰로(高麗局, 조선공산당중앙총국)를 설치했다. 이어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윤자영은 상하이에서 열리게 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경북지방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3·1운동을 전후해 러시아, 서울, 상하이 등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설립 초기부터 각 임시정부 계파 간 갈등은 물론 독립투쟁의 노선에 있어서도 갈등을 겪고 있었다. 1923년 3월의 국민대표회의는 민족운동의 지도기관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 신조직 건설론, 임시정부 개조론,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유지론의 세 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윤자영은 상하이파의 핵심이자 개조파의 리더였다. 결국 화합에 실패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큰 힘을 잃게 되었고 상하이파 내부에도 균열이 생겼다. 꼬르뷰로는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요인을 ‘윤자영 그룹’ 탓으로 돌렸다. 또한 상하이에 급파된 일제 경찰 간부가 ‘윤자영이 60여 명으로 구성된 상하이 고려공산당의 대표’라고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일제의 과녁이 되고 말았다.

이후 상하이에 자리 잡은 윤자영은 임시정부 의회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1924년 1월 의열단원인 김지섭(金祉燮)의 투탄(投彈)의거를 지원했다. 목적은 일왕의 살해였다. 김지섭의 도쿄 잠입을 도운 윤자영은 일경의 추적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4월 상하이에서 ‘청년동맹회’를 조직했다. 또한 같은 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에서도 윤자영은 지도적 인물로서 기관지 ‘거화(炬火)’의 편집을 담당했다고 한다. 신문에서는 ‘상하이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는 그를 체포하고자 백방 활동 중이나, 그는 정치범인고로 불국(佛國) 경관이 극력 보호해 아무 일 없이 청년동맹의 주요 간부까지 되고 있는 중이라더라’고 보도했다. 당시 일제 경찰이 파악한 그의 호는 ‘불가살(不可殺)’이었다.

#4. 모스크바에서 처형당하다

1925년 국내 조선공산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이듬해 4월 윤자영은 만주로 건너간다.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치하고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으나 그해 말 사임했다. 이후 얼마 간 그의 행적은 소상하지 않다. 1927년 3월에 모스크바, 5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행적이 있으며, 7월에는 용정에서 상하이파 공산주의자그룹인 재만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했다고 전해진다. 1928년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고 ‘12월 테제(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발표하면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12월 테제의 핵심 원칙은 ‘민족부르주아와의 결별’과 ‘일국일당제’ 두 가지였다.

‘12월 테제’에 근거해 국내에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재건설한다는 방침 아래 동지들이 집결했다. 윤자영과 동지들은 1929년 초 국내와 연결이 쉬운 중국 지린성 방면으로 근거지를 옮겨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기관지 ‘볼셰비키’를 발행해 선전에 주력하면서 1930년 순차적으로 국내로 진입, 함경남도 함흥에 뿌리내렸다. 함흥은 일제가 중화학공장을 세워 공업단지를 만들어가던 곳으로 노동자층이 두터웠다. 이는 뒷날 원산과 함흥 일대에 태평양노동조합이 거대한 힘으로 존립할 수 있던 배경이 된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는 코민테른의 해체 명령에 따라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1931년 5월, 윤자영은 일경의 포위망을 피해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12월에는 윤자영의 동지 상당수가 검거됐는데, 이는 역사 속에서 ‘간도검거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윤자영의 탈출 소식은 당시 신문 호외를 통해 ‘목하 검거망을 피하여 그림자를 감추었다’라고 보도되었다. 만주로 탈출한 윤자영은 중국 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 선전부에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유학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공산대학을 다니던 중 스탈린의 대숙청 바람에 휘말린다.

윤자영은 반당분자로 낙인찍힌 인물(지노비에프)의 논문을 소지, 유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1938년 10월2일 최고형인 총살형을 선고받고 10월14일 처형되었다. 그의 마지막 신분은 학생, 이름은 ‘Yun, Za Yen’ 혹은 ‘Chen Min’이었다. 광복 후 이념과 정치적 이념 아래 잊혔던 그는 민족적 일치단합과 청년의 대동단결이 독립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혁명가였고 일제의 추적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대담한 활동가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그의 이름은 윤자영이다.

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김희곤, 윤자영의 생애와 민족운동, 2005. 한국민족운동

사료.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청송의 독립운동사.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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