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따라 청도 여행 .3] 유천마을 근대거리

  •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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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6   |  발행일 2018-10-16 제13면   |  수정 2018-10-23
오래된 담배가게·정미소·소리사, 타임머신 타고 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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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읍사무소 유호출장소 방향에서 바라본 유천마을 거리 전경. 유천마을은 사람과 물산의 이동이 활발했던 곳이었지만 교통여건이 개선되면서 중심지 기능을 인근 도시에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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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판매소 간판이 걸린 옛 양조장 건물. 유천마을은 일제강점기 당시 양조업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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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정미소 내부에 도정기 등 정미를 위한 각종 기계장치가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정미소는 사진 동호인들의 방문지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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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마을의 전자제품 수리점이었던 중앙소리사. 건물 내부에는 오래전 수리를 맡긴 듯한 전자제품들이 아직 남아있다.

경북 최남단에 자리한 청도군 청도읍 유천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한때 사람과 물산의 이동이 활발했던 곳이었지만, 교통여건이 개선되면서 중심지 기능을 인근 도시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청도읍 유호·내호·사촌리를 비롯한 주변지역이 ‘유천(楡川)’이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마을 앞으로 청도천과 동창천이 합류하기에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 시리즈 3편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산업화시기까지 농촌의 근대화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유천마을에 대한 이야기다.

농촌 근대화의 흔적 오롯이 남아
경북·경남 접경…사람과 물자 집결
시조문학 대가 이호우·이영도 배출
일제강점기엔 3·1운동 벌어지기도
1970년 개관 유천극장 재개관 계획
영신정미소는 동호인 촬영지로 인기


#1. 사람과 물산이 모이는 교통 요지

유천마을은 나지막한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여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곳곳에서 샛노란 감이 익어가는 고즈넉한 농촌마을이지만, 과거 유천마을은 주변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 유천마을은 경북과 경남의 접경지에 자리한 교통의 거점으로 인근 사람과 물산의 집결지였다.

마을 서쪽의 청도천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청도읍과 대구, 경산으로 갈 수 있고, 동쪽의 동창천변을 거슬러 오르면 매전·운문면을 거쳐 영천과 경주로 갈 수 있다. 남쪽으로는 경남 밀양시 상동면과 접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덕분인지 유천마을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역로(驛路)가 존재했다. 또한 유천마을은 밀양에서 대구로 향하는 영남대로의 경유지 중 한 곳이었다. 지금은 상동역으로 이름을 바꾼 경부선 철도역인 유천역도 마을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유천역을 통해 사람과 화물이 오갔고, 철도우편을 통해 대처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기에 마을이 간직한 이야기도 많다. 일제강점기 때는 3·1운동 등 항일운동이 벌어졌고, 인근 지역에서는 보기드문 극장이 자리해 있었다.

유천장도 번성했다. 장의 규모는 인근 소재지의 5일장보다 컸으며 우시장도 자리하고 있었다. 포근한 지세 덕분인지 유천마을은 한국 시조문학의 대가인 이호우·이영도 남매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호우·이영도의 생가는 마을 중심부 도로변에 위치해 있는데, 문학과 더불어 살았던 남매의 삶을 기리려는 이들이 자주 찾고 있다.

#2. 과거가 박제된 곳

유천마을에서는 과거가 그대로 박제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최신식 건물은 적고, 고쳐지은 건물조차도 지붕이나 문틀만 바꾼 경우가 많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청도읍사무소 유호출장소에서 내호리로 이어지는 마을 중심부의 도로를 걷다보면 마치 1970∼8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만 같다. 차량 2대가 겨우 지나칠 정도로 좁은 옛 신작로를 따라 오래된 상가와 주택이 줄지어 서 있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도 꽤 남아있다. 상당수 상인들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건물을 터전삼아 삶을 이어가고 있다.

‘슈퍼마켓’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일명 ‘점빵’급의 잡화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요즘 점포처럼 화려한 진열대와 조명은 없다. 창이 여럿 달린 낡은 미닫이문 너머로 바라본 잡화점 내 상품들은 꼼꼼한 주인의 손길이 닿은 듯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옛 담배가게의 흔적도 곳곳에 있다. 담배를 팔기 위해 벽면에 작은 창을 뚫거나, 나무로 선반을 만들어 유리창을 달았다. ‘대공상담 113’이라 적힌 빛바랜 포스터만이 담배가게에 남아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에 자리한 미용실도 고풍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동안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수십년 동안 장터의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주차장으로 변한 옛 장터의 중심부를 둘러본 후 약방 건물을 지나면, 지금은 영업을 중단한 유천극장이 나타난다. 1970년대 개관한 유천극장은 인근 매전·금천면 주민은 물론 밀양 상동면 주민들까지 드나드는 문화공간이었다. 2층 관람석을 갖춘 극장은 인근 젊은이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다.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잦았으며, 장날이 되면 극장은 늘 만원사례를 이뤘다. 유천마을 토박이 손승춘씨(56)는 “어렸을 때 ‘이순신’이란 제목의 영화를 관람한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부터 손님이 줄기 시작하더니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유천극장은 폐관 이후 화재까지 겪으며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개축을 통해 옛모습을 일부 복원한 상태다. 청도군은 유천마을의 근대문화를 기념하기 위해 유천극장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을 계획 중이다.

극장을 지나면 옛 양조장 건물이다. 양조장은 사료판매소 간판만 걸린 채 비어있지만, 건물 창고에는 먹걸리통 등 술과 관련한 도구가 일부 남아있다. 유천마을은 일제강점기 당시 양조업으로 유명했다. 한때 6곳의 양조장이 유천마을에서 성업했다고 전해진다.

#3. 근대의 삶을 엿보다

‘중앙소리사’라는 간판이 걸린 전파사(電波社)는 기성세대의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기에 손색이 없다. 지금은 생소한 이름이 돼버린 전파사는 대기업 전자제품 서비스센터의 보편화 전 각종 전자제품의 수리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중앙소리사는 현재 문을 닫은 상태지만 옛모습을 일부 간직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오래전 수리를 맡긴 듯한 전자제품들이 제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남아있다.

전파사를 지나면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건물이 나타난다. 영신정미소다. 양철지붕 아래 빛바랜 나무처마 밑으로 흙벽이 둘러쳐져 있다. 정미소 입구의 우그러진 철문은 이 건물이 보냈을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건물 내부에는 보리와 쌀을 도정하는 기계가 자리해 있고, 곳곳에 뿌연 먼지가 덮여 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정미소의 내력을 알 수 있다. 대들보의 상량문에는 ‘소화 16년(1941년)’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수십년 전만 해도 정미소는 농촌의 마을마다 있을 정도로 흔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쌀농사를 짓는 농민이 줄었고, 가정용 정미기까지 도입됐기 때문이다.

영신정미소는 지금도 성업 중이다. 지난 추석 때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영신정미소 안주인 김말순씨(70)는 “경남 밀양에서 시집와 지금껏 유천마을에서 살았다. 1970년대 후반 영신정미소를 인수한 이후 계속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80년대만 해도 정미소 밖의 도로변은 높게 쌓인 쌀포대들의 차지였다.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정미소를 찾는 손님이 여전히 있기에 힘 닿는 데까지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영신정미소를 찾는 이들도 많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정미소는 사진 동호인들의 피사체(被寫體)로 손색이 없다. 인심 좋은 정미소 안주인은 “사진을 찍으러 온다면 누구라도 환영”이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정미소 맞은편은 이호우·이영도 시인의 생가다. 청도군은 현재 두 시인의 명작을 알리고 그들의 문학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문학관 건립을 고려 중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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