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마이가리 거품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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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3   |  발행일 2018-10-13 제23면   |  수정 2018-10-13

예전에 병영생활을 해본 이들은 ‘마이가리’라는 군대용어를 잘 알 것이다. ‘가불(假拂)’과 비슷한 말로 품삯이나 월급 따위를 미리 앞당겨 받는다는 뜻의 일본말 ‘마에가리’에서 파생된 용어로 알려져 있다. 요즘도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마이가리는 필자의 군 현역시절 광범위하게 통용됐다. 부대 내 매점(PX)에서 과자나 음료를 나중에 월급(?)받아 갚는다면서 미리 사 먹고는 ‘마이가리 했다’고 표현했다. 돈은 없고 배는 고프니 앞당겨 먹을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물론 몇 푼 안되는 사병 월급으로 간식비는 턱도 없기에 월급보다는 대개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로부터 송금받는 이른바 ‘향토 장학금’에 의존했지만.

보편적인 마이가리는 이등병에게 일등병 계급장을 달도록 하는 등 한두 계급 올린 계급장을 다는 것이다. 자기 중대의 졸병이 다른 부대원과 함께 식당과 매점을 쓰는 한 부대 생활을 하는 경우에 타 부대 선임병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기죽지 않게 하려는 상사의 배려다. 계급장 마이가리는 해당 중대 고참과 중대 인사계의 적극 개입과 중대장·소대장의 묵인하에 벌어진다. 타 병사의 행동거지를 감찰하거나 검문하는 헌병·위병의 경우는 하급자가 상급자를 다루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 부대보다 더 심한 마이가리가 행해지기도 했다. 규정 위반이지만 자기 중대의 졸병을 아끼는 상사의 배려심이 포함된 마이가리였기에 대대의 장교들도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

요즘 사회에도 어찌보면 마이가리 거품이 적지 않다. 한의원·치과병원 등 사설 병원들은 한 건물에 원장이 수두룩하다. 병원 하나에 원장은 한 명이면 족할 터이고, 나머지는 부원장이나 팀장으로 직무를 조절해야 마땅할 텐데 죄다 원장이다. 직급 인플레가 심하다는 느낌과 함께 신뢰감이 떨어진다. 행여 진료와 처방전에도 이런 부풀리기 거품이 들어가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장’ 호칭도 마찬가지다. 중소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뿐 아니라 구멍가게 운영자도 사장이고, 혼자서 술 파는 사람도 사장이다. 게다가 골프장에서 캐디들이 아무에게나 ‘사장님’이라 부르는 바람에 사장이 너무 흔해졌다. 사장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큰 규모의 회사 사장님은 빨리 부회장 또는 회장으로 명함을 바꾸고 싶어한다고 한다. 마이가리 거품이 우직한 정도(正道)를 능가하는 사회는 망한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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