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남 곡성 가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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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2   |  발행일 2018-10-12 제36면   |  수정 2018-10-12
큰 눈망울과 반듯한 눈매로 마주선 석장승 ‘복’품고‘액’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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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보고 선 가곡리 석장승. 마을을 보호하는 수구막이로 여겨진다. 가곡리 석장승 할머니 장승. 키가 210㎝ 정도로 해학적인 얼굴이다(왼쪽 작은사진). 가곡리 석장승 할아버지 장승. 키가 230㎝ 정도로 온화한 얼굴이다(오른쪽 작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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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 고샅길이 물줄기와 나란하고 커다란 당산나무가 맑은 그늘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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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신씨 재실인 치일재.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신덕린과 아들 신포시를 모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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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마을 끝 매봉 아래에 홀로 우뚝한 오층석탑. 보물 제1322호다. 현재 보수 중이다.

마주 본다. 오는 이를 맞이하고 가는 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길을 사이에 두고 뚝 떨어져서는 큰 눈망울로, 반듯한 눈매로 서로를 본다. 얼마나 오래 그리 꿈쩍도 않고 바라보았을까. 마을 사람들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훼방꾼이 되지 않으려면 허리를 굽혀 살그머니 걸어야 할 것만 같다. 길도 바람도 낮은 포복이다.

키 230㎝ 할아버지·210㎝ 할머니 장승
옥과천 물 빠져나가는 길목서 ‘액막이’
언제부터 입구 수호한지 기록은 없어
마을 안쪽 맑은 그늘 드리운 당산나무
길끝 잘 손질된 고령신씨 재실 치일재
홀로 우뚝하게 선 고려시대 오층석탑


◆ 가곡리 동구를 지키는 석장승

동구의 정자나무를 지나면 남쪽으로 뻗은 일직선의 길이다. 동네까지는 100m 즈음, 길가에 석장승 2기가 마주 서 있다. 그들은 마을 뒷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옥과천으로 빠져나가는 좁은 홈통 곁에 있다.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수구(水口)라 한다. 옛 사람들은 수구를 통해 복이 달아나고 액이 들어온다고 믿었다. 석장승은 그러한 복을 지키고 액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받침돌 위에 선 장승들은 키가 230㎝ 정도 된다.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훼방될 것 없는 크기다. 거뭇거뭇한 기미가 잔뜩 오른 듯한 장승은 할아버지 장승이다. 얼굴은 길고 귓불이 축 늘어져 있으며 또렷하지는 않지만 세 갈래 수염이 나 있다. 머리에는 관모를 쓴 것 같다. 손을 가지런히 겹쳐 배 위에 두었는데 얼핏 위패를 쥔 문신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온화한 표정이다. 가만히 쳐다보면 살짝 웃는 듯도 하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도 하다. 매끈한 피부의 장승은 할머니 장승이다. 계란형의 얼굴에 복스러운 주먹코, 커다랗고 동그란 눈, 살짝 오므린 작은 입술을 가졌다. 앙증맞은 두 손을 활짝 펴고 배꼽 위에 올린 모습이 마치 배를 보호하는 듯하다. 머리 위의 삼산관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데 족두리를 쓴 형상이라 한다.

이 길을 마을 사람들은 장승거리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마을 입구를 수호하고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도둑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옛날부터 사람이 아프면 장승을 찾아가 코를 부비며 완쾌를 빌었다고도 한다. 마주보는 시선의 장이 지구처럼 둥글다. 복은 꼼짝없이 갇히고 액은 하릴없이 튕겨날 듯하다. ‘진실의 입’에 손을 넣는 순간처럼 석장승 앞에서 머뭇댄다. 그리고 길처럼 몸을 낮춘다.

◆ 가곡마을

이곳은 곡성의 가곡리(柯谷里)다. 마을은 고려 경종 때 형성되었다 한다. 옛날에는 주위의 산세가 개(介)자와 같다하여 개동(介洞)이라 했는데 조선 정종 때인 1400년경에 가곡(柯谷)으로 개칭했다. 마을은 매봉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마을 바로 앞으로는 가곡천과 옥과천이 흐른다. ‘개(介)’자는 산과 두 물줄기를 닮았다. 마을을 들고 나는 길이 있을 뿐 마을을 관통하는 길은 없다. ‘가(柯)’자는 그런 자루 같은 모양을 두고 생긴 이름일까. 그렇다면 석장승은 자루목이겠다.

마을 초입에 가곡 노인정과 마을회관, 버스 정류장과 엄청 너른 광장이 있다. 마을 안 고샅길은 물줄기와 나란하고 커다란 당산나무가 맑은 그늘을 드리운다. 동구의 당산나무는 당 할머니, 마을 안의 당산나무는 당 할아버지라 한다. 옛날 당산에 제를 올릴 때면 석장승 앞에도 간단한 음식을 진설해 놓고 농악을 치며 아들 낳기를 빌었다고 한다. 당산제는 30여 년 전까지 지내다가 지금은 중단되었다.

고샅길을 빠져나가면 작은 밭들이 펼쳐진 산자락이다. 듬성듬성한 집들을 지나 길 끝에 다다르면 번듯하게 잘 손질된 팔작지붕의 건물이 자리한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재실인 치일재(致一齋)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내외와 그의 아들 호촌(壺村) 신포시(申包翅) 내외를 모신 곳이다. 삼문을 통과해 계단을 오르면 작은 문인석 2기가 재실로 향하는 길을 호위한다. 동구의 석장승과 닮았다. 재실 위쪽으로 석탑 하나가 그물에 둥둥 둘러싸인 채 덩그러니 섰다. 매봉 아래, 마을 끝에.

◆ 마을 끝 오층석탑

탑은 보수 중이다. 공사 기간은 벌써 끝났지만 보수는 진행 중이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가림막 속을 슬쩍 들여다본다. 깨지거나 갈라지거나 시멘트로 붙여놓은 흔적이 없다. 탑은 거의 완전하다. 높이는 6.4m로 매우 날렵하게 솟아 있다. 탑은 백제의 석탑 양식으로 쌓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여겨지며 보물 제1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이 있으니 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층석탑 주변에는 사찰의 흔적이 전혀 없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덕린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은 아버지의 묏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예전 신덕린의 집에서 일하던 이를 만나게 된다. 그는 승려가 되어 사찰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찰의 자리가 천하명당이니 옛 주인을 그곳에 모시라 했다. 장례일이 되어 이곳으로 오니 승려는 사라지고 절은 불타 석탑만이 남아 있었다 한다. 고령신씨 가문의 기록에도 화재로 소실된 절터에 묘를 썼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일부러 불을 질렀을 거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아마 고려 말 왜구의 침략으로 불탔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 절은 흔적도 없는데 탑은 온전하다. 몸에는 그을린 자국 하나 없다.

석탑 앞에 서면 치일재 지붕과 앞마당이 보인다. 마치 절집 같다. 석탑을 지키는 절집. 재실 앞 문인석이 원래는 석탑 앞에 있었다 한다. 어쩌면 고령신씨는 빈 절터에 묘를 쓴 이후 최선을 다해 석탑을 보호해 왔던 것이 아닐까. 한편 동구의 석장승이 원래는 사찰의 비보용 벅수(석장승)라는 의견도 있는데 동의하지는 않는다. 석장승은 오늘을 지키고 석탑은 과거와 미래를 비보한다고 그리 믿으련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88고속도로 광주방향 순창IC에서 내려 벌교 옥과 방면 27번 국도를 타고 간다. 옥과면 평장삼거리에서 우회전해 13번 국도로 잠시 가다 용두교차로에서 옥과 쪽으로 빠져나가 곧바로 좌회전해 오산면 가곡리 방향 가곡길을 따라가면 된다. 마을 동구에 석장승이 자리하고, 마을을 관통해 한참을 들어가면 고령신씨 재실과 가곡리 석탑이 산중턱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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