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1등 학생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가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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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1   |  발행일 2018-10-11 제38면   |  수정 2018-10-11
힘세고 가장 빠른 1등 정자
오히려 난자를 만나지못해
수억마리 연대로 수정 가능
공감돼야 행복지수가 높아
서열 아닌 존중을 가르쳐야
[여성칼럼] 1등 학생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가 있다고요?

‘1등 학생들이 타고 있어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붙이고 달리는 학원 차량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상위권 1%의 비밀을 알려준다는 학원들이 성행하고 전교 1등 자녀를 둔 부모는 ‘최고 권력자’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1등 지상주의와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권력과 재력을 거머쥔 1% 사람들의 갑질 소식이 뉴스에 가득하다.

1등에 대한 신화는 오래된 것 같다. 얼마전 ‘아빠본색’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아빠가 아들들을 모아 놓고 성교육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여기서 그는 “모든 정자 중에 가장 힘세고 예쁜 정자가 난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에 한 아이가 그중 가장 큰 모양의 정자를 가리키며 “그럼 이거네”라고 말하자 아빠는 “맞아”라고 하며 생명 탄생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의 성교육은 유쾌하고 즐거웠으며 모범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힘세고 가장 빠른 1등 정자가 난자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2005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정자와 난자의 수정과정을 100% 실제 촬영한 영상을 EBS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2조4천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7년 동안 10여국이 공동 제작한 것이었다. 이 영상을 보면 최고 힘이 세고 1등으로 달린 정자는 난자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먼저 앞선 정자들은 일종의 특공대처럼 여성의 면역체계에 의해 희생되고, 그 틈에 살아남은 후발대 중 몇 백 마리만이 난자 가까이 간다. 결국 1등으로 달린 정자도, 가장 힘센 정자도 아닌 정자가 난자를 만나는 것이다. 더욱이 난자의 막을 뚫는 모습도 여러 마리가 힘을 합쳐 함께 뚫기도 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정해지지 않은 정자가 난자를 만나고 특히 더욱 중요한 것은 3억~4억 마리의 정자가 없었다면 그 1마리 정자 또한 난자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은 이미 탄생의 순간에 증명됐다. 즉 4억 마리의 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지 17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왜 아직도 힘센 1등 정자 신화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걸까? 우리는 이미 수 억 마리 정자들의 연대와 난자의 노력으로 태어났다. 즉 서열화시키거나 배제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연대과정으로 내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우리 삶을 쉼 없이 경쟁에 몰아넣고 부추긴 서열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가? 세이브더칠드런 조사에서 한국은 국가경제력 11위, 1인당 국민총소 득 세계 13위, 고등교육 1위이다. 수치로만 보면 한국은 거의 선진국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부패지수가 상위권이고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가 거의 꼴찌다.

서유럽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 중에 하나가 사람들의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결과조사를 본 적이 있다. 희로애락에 대한 감정 공감도가 높을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중, 타인에 대한 자유, 타인에 대한 평등에 공감의식이 높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나라 국민들의 특성이 아니라 교육시스템에서 공감교육이 정규과목으로 책정되어 교육되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1등이 아니라 연대를, 서열이 아니라 공감과 존중을, 배제가 아니라 환대를 위한 공동체 문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되어야 하는 것이다.

혐오의 시대라고까지 규정되는 오늘날, 이제 서열화하고 타자를 배제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연대와 공감을 위한 ‘타자를 환대하는’ 공간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우리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존중 받는 세상, 어떤 관계에서도 지배나 굴종, 학대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가능하다. 자궁 속으로 들어가서 수억 마리의 연대과정이 있었기에 내가 존재했음을 다시 인식하고 태어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 본다.

이승연 (소우주성문화인권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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