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하토야마 유키오씨의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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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1   |  발행일 2018-10-11 제37면   |  수정 2018-10-11
[기고] 하토야마 유키오씨의 무릎
사윤수 (시인)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는 사람, 말은 잘못했다고 하는데 자세가 뻣뻣한 사람은 아직 의심스럽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사죄하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는 사람이 있다. 이 정도라면 진정성이 엿보인다. 어느 한 사람은 그보다 더 절절한 자세로 피해자들에게 사죄했다.

지난 2일 부산대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에게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알다시피 하토야마 총리는 지한파이고, 한일관계 회복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쓰고 있다. 부산대가 그런 우애에 가늠하는 보답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군 강제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도 하토야마 총리와 일찍이 인연이 있어서 축하를 하기 위해 부산대에 가는데 할머니를 모시는 몇 분과 나도 동행하게 됐다.

하토야마 총리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니 그는 한결같이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목례하거나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기도하듯이 감사 표시를 했다. 그런 자세는 간단하지만 마음으로 익히지 않으면 고난도의 요가처럼 하기 어려운 자세다. 진정성이 있어야 어느 때든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아시아 평화 공동체 구축’ 특강에서 그는 “사과는 피해자가 이제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꽃다발을 전달하는 이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몇 번이나 할머니를 다독이며 위로하자 참석자들이 함성과 박수를 헌사했다.

다음날 주최 측과 하토야마 일행은 합천으로 가 원폭피해자들을 만났다. 우리 일행도 계속 함께했다. 그가 원폭피해자복지관에서 마이크를 들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는 모습을 본 뒤 우리는 앞서 나왔다. 정치인들이 어디를 방문하거나 행사에 오면 대부분 대략 훑어보고 일정에 쫓겨 가는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총리 일행은 서둘러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밖에서 ‘왜 이렇게 안 나오나’하면서 기다렸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총리 일행이 내려왔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틀에 걸쳐 행사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와 이모저모 뉴스를 보니 아, 내가 가장 중요한 장면을 그만 놓쳤음을 알게 됐다. 그가 복지관에서 늦게 내려온 까닭은 총리를 환영하기 위해 복지관에 모여 있는, 서른 분쯤 되는 피해자들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고 일일이 사과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피해자 한 분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다음 분에게 사과해야 하니 무릎을 꿇은 채 무릎으로 걷듯이 몸을 옮겨 또 사과하고 양복바지 무르팍이 바닥 먼지를 닦듯이 이어가며 사과를 하느라 다소 시간이 걸린 것이다. 설사 그 모습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일본인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가 아닌 국가의 죄업 때문에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였던 칠순의 남성이 그렇게 사과한 그 순간만은, 피해자의 억울함이 아닌 가해자의 감동적인 사과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국 군부독재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국민을 도륙하고 지금까지 사죄는커녕 단 한 번의 반성조차 없이 도리어 저 잘했다는 식이 아니었던가.

독일 빌리브란트 총리는 자국의 죄악을 참회하며 폴란드인 전쟁 희생자 기림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한베평화재단의 한국인 회원들은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베트남에 가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2015년 이미 서대문형무소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적이 있다. 이번 특강에서 그는 일본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미래를 얘기한다면 그건 큰 모순이며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는 자신이 3선에 성공해서 기고만장할지 몰라도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한국 피해 신고자 238명 가운데 이제 스물여덟 분이 생존해 계신다. 혹여 아베는 ‘머지않아 피해자들이 다 사망할 테니 그럼 문제는 끝나겠지, 그럼 사죄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이기는 거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피해자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국가책임자로서 진정으로 사과하는 것이 모두가 승리하는 길이다. 미성숙하고 결핍의 노예인 아베 총리는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다. 좋은 기회야말로 오래 머물지 않는 법이다. 당신이 살아있을 때 사과할 수 있는 행운을 놓치지 마시라. 한일 양국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무릎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하토야마 총리에게 배우시라. 저무는 풍경이 아름다운 이 가을날, 지금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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