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순창 신말주 후손 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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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05   |  발행일 2018-10-05 제36면   |  수정 2018-10-05
소나무 숲길 열고 들어간 곳에서 한가로이 살어리랏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순창 신말주 후손 세거지
수백 년 되었다는 소나무 숲이 마루금을 열고 그 길 끝에 귀래정(歸來亭)이 자리한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순창 신말주 후손 세거지
귀래정.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건물로 신말주가 귀향하여 지은 정자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순창 신말주 후손 세거지
내삼문인 여견문. 안채로 통하는 문으로 단아한 모습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순창 신말주 후손 세거지
왼쪽은 유장각, 오른쪽은 충서당이다. 유장각에는 신씨 후손들의 서책과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순창 신말주 후손 세거지
안채인 자혜당과 별도로 구획되어 있는 사당 남산사.

“어디서 왔소?” 남산 마을회관 앞에서 한 아주머니가 다정하게 묻는다. 전라도 땅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정자 보러 오셨구만.” 그녀들은 이방인의 방문 목적을 이미 다 알고 있다. 마을 회관의 유리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들의 얼굴이 일제히 이방인을 향해 있다. 부드럽게 주름진 따뜻한 얼굴들이다. 이곳은 순창읍의 남산(南山)마을, 해발 60m 정도의 남산에 느긋이 기대앉은 동네다. 순창 IC를 통과하기 직전 문득 산마루의 정자 하나를 본 듯하다면, 바로 그곳이다.

단종 폐위후 신숙주 동생 신말주 터전
담장두른 축대위 안채 통하는 여견문
소박하지만 위엄스러운 네칸의 건물
안채와 별도로 구획된 사당 ‘남산사’
좁은 돌계단 오르면 비밀스러운 숲길
벼슬 접고 낙향해 지은 정자 ‘귀래정’
허백당·강희맹 등 명사 쓴 편액 즐비

◆신말주 후손 세거지

남산은 순창군의 진산인 오산(烏山)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남산은 남산대(南山臺)라고도 불리는데 고려 때부터 순창설씨(淳昌薛氏)가 살고 있었다. 조선 세조 때 고령신씨(高靈申氏) 신말주(申末舟)가 설씨 가문의 여인과 혼인을 하면서 남산마을에 신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신말주의 형이 신숙주(申叔舟)다. 조선 초기 정치적 사건의 핵심에서 늘 등장하는 인물이다. 형이 공신(功臣)으로 출세를 거듭하는 동안 동생 신말주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이곳에 은거했다. 이후 신씨는 대대로 세를 이루어 이 고장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산은 생각보다 가파른 모양이다. 담장을 두른 축대가 높다. ‘일관문(一貫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에 들어서면 여견문(如見門), 유장각(遺藏閣), 충서당(忠恕堂)이 높은 축대 위에 앉아서 방문객을 내려다본다. 대단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협문을 지키는 유장각은 신씨 후손들의 서책과 목판이 보관된 곳이다. 이곳에는 설씨부인의 ‘권선문첩(勸善文帖)’도 있었다고 한다. 권선문첩은 설씨부인이 강천산에 절을 세우고 신도들에게 시주를 권하는 글을 짓고 사찰의 설계도를 그려 돌려보게 한 화첩으로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 쓴 가장 오래된 필적이라 한다. 그것은 지금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보물 제 7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견문은 안채로 들어가는 내삼문이다. 문 앞에 서면 일단 정지다. 바로 앞에 방형의 동산이 길을 막고 있다. 높지는 않지만 확실한 벽이다. 벽 너머로 자혜당(慈惠堂) 현판을 건 네 칸 건물이 당당하다. 소박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이곳에서 설씨부인이 태어나고 생활했다.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는 3칸의 작은 건물이 있는데 남애정사(南厓精舍)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 한 울타리에 있는 것이 묘한데, 남애정사는 아이들의 공부방이 아니었나 싶다.

자혜당 왼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구분된 사당(祠堂) 남산사(南山祠)가 있다. 사당 앞에 세워놓은 배향록(配享錄)을 보니 고령신씨 남산파를 대표하는 열두 분의 조상들이 배향되어 있다. 검은 더께 앉은 건물을 받치고 있는 묵직한 대리석 기단이 근래의 보수를 말해준다. 사당 앞에는 웅장한 남산사 창건비가 서 있다. 그 주변으로 커다란 바윗돌이 흩어져 있는데 꼭 흰 도포를 입은 흰 수염의 노인이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신말주 이후 이곳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지만 널리 알려진 이는 영조대의 실학자인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이다. 그는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와 우리나라의 산세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산경표(山經表)’ 등의 저술을 남겼다. 당연하고, 쉽고, 익숙하게 써 왔던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말이 그의 책 ‘산경표’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 거(居)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곳곳에 있는 수많은 기념비들과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은 여전한 세(勢)를 느끼게 한다.

◆귀래정

유장각과 충서당 사이에 좁은 돌계단이 산을 오른다. 은근히 비밀스러운 길이다. 숲을 잠시 오르면 수백 년 되었다는 소나무 숲이 마루금을 연다. 그 길 끝에 귀래정(歸來亭)이 있다. 신말주가 낙향하여 지은 정자다. ‘귀래’는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다. 정자의 이름은 서거정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인용해 지었고 신말주의 호(號)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의 노여움과 형 신숙주의 강권으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반복하다 70세 무렵 다시 귀래하였다.

귀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로 한가운데에 한 칸의 방이 있다. 호흡곤란이 올 것 같은 작은 방이지만 창은 넉넉하다. 기단은 낮고 마루에는 난간이 없어 방안의 주인과 언제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정자에는 현판이 여럿 걸려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한운야학(閑雲野鶴)’이다. 이는 아무 속박됨이 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생활의 비유라 한다.

마루에는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강희맹(姜希孟), 하서(河西) 김인후(金隣厚) 등 명사들이 쓴 편액이 즐비하다. 그 중 십노계(十老契)라는 편액이 눈에 띄는데, 신말주가 70세가 넘은 노인 10명과 맺은 계회의 이름이다. 그가 쓴 십노계첩(十老契帖)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옛사람들은 우주 내의 모든 사람은 다 형제라 말하였는데, 항차 그 우주 속에서도 또 같은 나라 같은 고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서로의 정분이 어떠하겠오.’ 그는 ‘위 아 더 월드’의 세기 훨씬 이전에 우주적인 인연을 이야기 한 사람이었고 그들의 노후는 소박한 술상과 시가 있는 삶이었다.

순창 읍내가 내려다보인다. 전망은 빛처럼 뻗어 나간다. 한 청년이 귀래정으로 올라오고 있다. 슬리퍼를 신고, 이어폰을 끼고, 겨드랑이에는 책 한권이 끼워져 있다. 이 우주 속,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누리는 인연인가. 자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이 옛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하서 김인후는 이곳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옛사람 떠나간 지 오래되었건만/ 지난 자취 정자에 머물러 있네//후손에게 남긴 업 멀리 생각하니/ 유달리 나그네 된 정이 놀랍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방향으로 가다 순창IC에서 내린다. 순창IC교차로에서 우회전해 400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주유소가 있는데 그 옆 남산 정미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된다. 남산마을회관 앞에 주차하면 세거지까지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정표도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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