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6] 의병대장 이현규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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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27   |  발행일 2018-09-27 제14면   |  수정 2018-09-27
일제에 맞선 의병장, 오누이못 전투서 일본군 적장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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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진보 진안리에 있는 의병대장 이현규의 기념비. 오누이못 사이 도로변에 자리한 기념비의 전면에는 ‘의사내산이하현선생기념비(義士奈山李夏玄先生紀念碑)’라 새겨져 있다. ‘하현’은 이현규 선생의 자(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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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누이못 (윗못) 전경. 이현규 부대는 오누이지 전투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집사 조완이가 전사했고 이현규는 총상을 당했다.

청송 진보의 객주문학관 뒤쪽, 청송로를 사이에 두고 2개의 못이 자리한다. 윗못은 오라비못, 아랫못을 누이못이라 하여 합쳐서 ‘오누이못’이라고 부른다. 맑은 연(蓮)과 강인한 풀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푸른 못이다. 옛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 이 못가에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1906년 4월의 전투, 그날 푸른 못은 붉었다. 지금 그 못가에는 한 의로운 이를 기리는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일제가 폭도괴수, 비적괴수라 칭하였던 이, 그는 의병대장 이현규(李鉉圭)다.

고려말 두문동 출신 모은 이호의 후손
을사늑약 후 청송 주왕산서 의병 결의
일본군 10여명 처단 큰 전공 올렸지만
적군의 강력한 역습에 타격 입고 해산
포항에 은거하며 70여명 제자 가르쳐
총상 여독 탓으로 44세 나이에 생 마감

#1. 문무를 겸비한 재목

이현규는 1874년 11월16일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수단(李壽檀),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이현규는 4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다. 본관은 재령(載寧)이며, 자는 하현(夏玄), 호는 내산(奈山) 또는 우해(于海)였고, 능우(能雨)라는 이명도 있었다.

그는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함안(咸安)으로 내려와 고려동(高麗洞)을 세우고 자신은 한 일이 없다 하여 유언으로 백비를 세우게 한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후손이다. 재령이씨의 영양 입향조는 9대조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다. 그는 운악(雲嶽) 이함(李涵)의 아들로 광해군의 난정에 과거를 단념하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은거한 인물이다. 석계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평재(平齋) 이융일(李隆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등 여러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외조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학문을 이어받아 당대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들로 이름이 높았다. 고조 이광겸(李光謙), 증조 이상호(李相昊), 조부 이규영(李葵榮) 그리고 아버지 이수단 등도 가학을 이어 받아 영양을 대표하는 명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이현규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아이였다고 전해져 왔다. 재주와 지혜가 남달라 수업을 받으면 즉시 뜻을 헤아렸고 글을 지으면 뛰어난 구절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기상이 강건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는데, 학문과 함께 무예를 익히니 사람들이 문무를 겸비한 재목이라 하였다. 이현규는 안동권씨(安東權氏)와 결혼하여 3남1녀를 두었다. 그는 운악 이함과 그 아들 석계 이시명의 곧은 충성과 높은 절개를 마음 깊이 받들었고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의 학문을 가학으로 이어 받았다.

#2. 오누이못 전투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전국은 분노와 저항으로 넘쳐났고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이어졌고 자결하는 순국자도 속출했다. 이현규는 1905년 11월 청송 주왕산(周王山) 대전사(大典寺)에서 동지 수십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여러 군과 읍에 격문을 보내 거의(擧義)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12월 중순,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등의 지역으로부터 모여든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현규는 동지들의 뜻에 따라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 의진(義陣)을 편성하였다. 부서 책임자로는 중군장에 류시연(柳時淵), 도포장에 김대규(金大圭), 소모장에 신형일(申衡一), 도포수에 권대성(權大聲), 집사에 조완이(趙完伊)가 각각 임명되었다. 그리고 주왕산과 청량산 등에서 의병 500여 명을 훈련시킨 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현규 부대는 2월과 3월에 걸쳐 일본군과 수십 차례 교전(交戰)했다. 영양군 입암면 교동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울진 죽변에 있는 일본 해군의 망루를 기습하여 격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4월, 진보의 장수령(長水嶺)에서 일본군 오장(伍長) 무토(武藤)가 이끄는 헌병 부대와 맞닥뜨린다. 수차례 교전이 이어졌고 진보의 남쪽 ‘오누이지’ 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마침내 이현규 부대는 무토를 비롯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다. 이때 오누이못을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으며 이현규 부대는 패하여 달아나는 무토 부대를 파천면 어천까지 추격하여 사살했다고 한다. 오누이못 전투에서 집사 조완이가 전사하였고 이현규도 총상을 당했다. 일제는 오누이못 둑에 일본군 오장 무등의 순직비를 세웠다. 광복 후 그 비석은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다. 당시 일제는 ‘폭도괴수 이하현’ ‘비적괴수 이하현’이라 하였는데, 의거 당시에는 자(字)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현규는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의병을 정비한 뒤 5월 울진 죽변의 왜관(倭館)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어 영양군 북방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증원된 일본군의 역습으로 도포장 김대규를 비롯해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였고 이현규도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 전투로 이현규 부대는 큰 타격을 입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이현규를 붙잡기 위해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상금과 벼슬을 주겠다는 방을 붙이기도 했다. 이때 한 동지가 상처를 염려하여 자수를 권하자 이현규는 크게 꾸짖는다. “차라리 제(齊)나라 의사 전횡(田橫)처럼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흉노에 항복한 위율(衛律)처럼 살겠느냐.” 일제의 추격과 회유는 계속되었다. 그는 ‘나에게는 의로운 죽음이 있을 뿐이오. 더러운 삶은 있을 수 없다’며 뜻을 꺾지 않았다.

#3. 충에 죽고, 열행에 죽고, 효에 죽다

1908년 봄 이현규는 부대를 해산한 뒤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지금의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진리)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는 글방에서 70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으면서 재기를 준비하였다. 이현규가 은거하자 일제는 그를 붙잡기 위해 온갖 난폭한 짓을 자행했다. 정탐자를 풀어 수배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집을 불태웠으며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해 있던 아내 권달(權達)을 붙잡아 10여 일 동안 온갖 고문을 했다. 또한 장인인 권찬익(權燦翊)까지 끌고 가 고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처가 식구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유랑하였다.

이현규의 부상은 쉽게 낫지 않았다. 그는 1917년 2월3일 결국 총상의 여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부인은 고문으로 얻은 병과 일제의 감시로 무척 어렵게 살았지만 결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맏아들 이기호(李氣浩)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유해가 되어 돌아왔다. 안동의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이현규의 묘갈명(墓碣銘)에는 ‘공(公)은 충(忠)에 죽고 아내는 열행(烈行)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 죽었다. 충효열 삼강이 공의 집에 모여 있으니, 세상에 그와 다시 짝할 만한 이가 있겠는가’라며 추모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현규의 생가가 있던 곳에 옛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참고=청송군지, 청송의병 사이버박물관 자료, 국가보훈처 자료, 한국독립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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