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29] 강원 화천 곡운구곡(上)...조세걸이 사실감 있게 그린 구곡도 ‘정선 진경산수화’ 토대가 되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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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20 08:07  |  수정 2021-07-06 14:46  |  발행일 2018-09-20 제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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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화가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 중 1곡 방화계(위)와 3곡 신녀협. 김수증과 답사하며 그린 이 곡운구곡도는 진경산수화의 장을 연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용담계곡)와 삼일리(삼일계곡)에 걸쳐 있는 구곡이다. 화악산(해발 1천468m)이 만들어낸 이 계곡 15㎞에 설정된 곡운구곡의 주인공은 곡운(谷雲) 김수증(1624~1701)이다. 김수증은 이곳 용담리에 농수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1곡 방화계(傍花溪)부터 9곡 첩석대(疊石臺)까지 아홉 굽이의 이름을 붙이고 구곡을 경영했다. 나중에는 구곡 그림을 그리게 하고, 구곡시도 아들과 조카 등에게 짓게 한 후 화첩으로 만들어 남기기도 했다.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의 장손으로 태어난 김수증은 효종 임금이 죽자(1659년) 일어난 예송논쟁으로 권력의 부침을 겪으면서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아버지 김광찬(1597~1668)이 세상을 떠나고 3년 상을 치른 뒤 47세(1670) 되던 봄날, 은둔지를 찾아 화천 땅을 밟게 된다. 지금의 화천군 사내면 용담1리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곳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93)이 잠시 은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수증이 은둔지를 찾아 설정한 구곡

김수증이 터를 잡은 곳은 스승인 우암(尤庵) 송시열(1607~89)에게 “우리나라 산수는 봉래산 만폭동을 첫째로 치지만, 수석이 평평하고 골이 넓어서 유영(遊泳)하고 반환(盤桓)하며 서식(栖息)하고 경착(耕鑿)할 만하기로는 저 만폭동이 이곳보다 못한 바가 있습니다. 더구나 매월당의 유적이 여기에 있으니, 제가 터를 잡아서 의지할 곳으로 삼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곳이다.

북한강의 지류인 사내천(史內川)이 흐르는 골짜기를 은둔지로 삼은 그는 그 이름을 주자(朱子)가 은둔했던 운곡(雲谷)을 거꾸로 써서 곡운(谷雲)으로 바꾸었다.


용담·삼일계곡 걸쳐있는 15㎞ 구곡
예송논쟁으로 부침 김수증이 설정
47살때 은둔지 마련해 집짓기 시작
스승 송시열·아우 김수항 사약받자
권력무상 느끼고 홀로 다시 들어와
화음동정사 짓고 은둔하다 세상 떠



1673년 김수증은 곡운을 다시 찾아와 주자가 무이산에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정하여 노래한 것처럼 곡운구곡을 설정했다. 송시열과 영의정을 지낸 아우 김수항(1629~89) 등이 유배된 1675년 겨울에는 온 가족을 데려와 살면서 곡운정사(谷雲精舍)라는 현판을 내걸고,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도 세웠다. 이때 곡운구곡을 설정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서인이 세력을 회복한 1681년에는 병이 나서 산을 나갔다가,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사(死賜)된 기사환국(1689)이 일어나자 홀로 다시 곡운으로 들어와 화악산 북쪽에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짓고, 권력무상을 처절하게 느끼며 곡운에 은둔하다가 1701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689년에 지은 ‘곡운기(谷雲記)’를 보면 곡운의 위치와 형세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 곡운에 머물면서 바라보니 큰 산이 그 바깥을 두르고 작은 산이 그 안에 뒤섞여 사면을 둥글게 감싸 안은 것이 별세계를 열어놓고 있다. ~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되었으니, 세간에서 소박삽(小撲揷)이라 부르는 곳이다. 계곡 어귀가 그윽하고 깨끗하며 기상이 깊고도 으슥했다. 급한 여울과 층층바위에 바위꽃이 무수했다. 그래서 이름을 방화계(傍花溪)로 바꾸었다. 다시 십여 리를 가니 돌다리가 물가에 걸렸는데 약간 널찍하다. 진실로 광채가 있는 듯해 청옥협(靑玉峽)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리쯤 가자 이른바 여기정(女妓亭)이란 것이 있었는데, 신녀협(神女峽)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 내가 골짜기 가운데로 가서 집을 지었다. 경술년(1670) 가을에 시작하여 몇 년 사이에 겨우 일곱 칸의 띠집을 지었다. 을묘년(1675) 겨울에 온 집안이 와서 살았다. 띠집을 지은 후에 또 초당(草堂) 세 칸을 짓고, 편액을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했다. 또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家廟)를 세웠다. 좌우에 아이들의 방을 짓고 마굿간, 행랑, 부엌 등의 부속 건물을 간략하게 구비했다.’

◆조세걸의 곡운구곡도는 진경산수화의 토대

그는 곡운구곡을 매우 사랑하여 1682년에는 당대의 대표적 화가 패천(浿川) 조세걸(1635~1705)을 불러 곡운구곡과 농수정의 모습을 비단 위에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발문은 김창협이 썼다.

곡운구곡도가 완성된 후 10년이 지난 1692년에는 자신을 비롯한 두 아들과 다섯 조카, 외손자를 동원해 주자의 ‘무이도가’ 운(韻)을 따라 곡운구곡의 매 굽이를 읊은 칠언절구의 시를 짓게 하고 화첩을 만들었다. 곡운구곡도첩이다.

김수증이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한 경위에 대해 조카 김창협이 지은 ‘곡운구곡도발(曲雲九曲挑跋)’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내 두 다리가 때때로 산에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구곡을 늘 내 눈 안에 머물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각날 때 가끔씩 보려고 한 것일 뿐이다.’

그가 곡운구곡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는 이전 그림과 달랐다. 생생한 우리 산수의 모습은 물론 띠집과 백성들이 농사짓는 모습에다 닭, 개, 소, 나귀 등의 동물들 움직임까지 사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제작할 때 김수증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지 지도했다고 한다. 최대한 사실대로 그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겸재 정선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의 토대가 됐다.

곡운구곡도(가로 425㎝·세로 64㎝)는 진경산수화의 장을 연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조세걸은 평양 출신으로, 연담 김명국에게 그림을 배운 선비 화가다.

김수증은 곡운구곡시의 서시와 1곡 시를 읊었는데, 서시에서 곡운구곡 탐승을 성령(性靈) 양성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고 있다.

‘티끌세상 벗어나 마음 닦기 알맞구나(絶境端宣養性靈)/ 늘그막의 마음 맑은 산 맑은 물로 기쁘도다(暮年心跡喜雙淸)/ 백운산 동쪽 화악산 북녘(白雲東畔華山北)/ 굽이굽이 물소리 귀에 가득하네(曲曲溪流滿耳聲).’

1곡 방화계는 봄철에 바위마다 꽃이 만발하는 계곡이라는 의미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들어가는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방화계를 지나는 물이 완만히 흐르다가 너럭바위에 이르러 격한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김수증은 무이도가의 운을 차운하여 1곡을 직접 읊었다.

‘일곡이라 세찬 여울 배 들이기 어려운 곳(一曲難容入洞船)/ 복사꽃 피고 지는 속세와 동떨어진 시내(桃花開落隔雲川)/ 깊은 숲에 길 끊어져 찾는 이 드무니(林深路絶來人少)/ 어느 곳 산골 집에 개가 짖고 연기 나겠는가(何處山家有吠煙).’

당시에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심산유곡이었던 모양이다.

2곡 청옥협은 맑고 깊은 물이 옥색처럼 푸른 골짜기다. 방화계로부터 사내천을 한참 거슬러 오르면 우측에 높게 솟은 바위 봉우리와 만나게 된다.

‘계림을 따라 석림(石林) 가운데를 지나니 높고 낮은 큰 돌들이 많고, 산봉우리는 연결되어 하늘을 막은 듯하며 길은 다한 듯하나 다시 통한다. 또 십여리를 가니 석잔(石棧)이 물 사이에 있고 점차로 전망이 트여가는 것 같았다.’

이래서 이곳을 청옥협이라 부른다고 김수증은 ‘곡운기’에 적고 있다. 아들 창국이 차운하여 시를 짓게 한 곳이다.

‘이곡이라 험한 산에 옥봉우리 우뚝하니(二曲峻玉作峰)/ 흰 구름 누른 잎은 가을빛을 발하네(白雲黃葉暎秋容)/ 돌다리 가고 가서 신선세계 가까우니(行行石棧仙居近)/ 속세 떠나 몇만겹 들어온 줄 알겠네(己覺塵喧隔萬重).’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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