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10] 문무를 겸비한 박진경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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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20   |  발행일 2018-09-20 제15면   |  수정 2018-09-20
왜군에 살해된 부친의 시신 목숨걸고 수습해 장사지낸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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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이면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박진경을 배향하고 있는 남강서원.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 있는 서원으로 1792년(정조 16) 창건해 1866년(고종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 이후 남강서당(南岡書堂)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유지되다가 다시 복원했고, 1877년부터 격년으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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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서원의 충의사. 남강서원은 박진경을 비롯해 상주 북천전투에서 전사한 김종무와 그의 아들 김공, 그리고 양탄 김양을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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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의 대표적인 저서인 ‘와유당문집(臥遊堂文集)’.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 고리실 마을에서 태어난 박진경은 유학자이면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자는 명술(明述), 호는 와유당(臥遊堂)이다. 1596년(선조 29) 16세 되던 해에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왜란 중이라 끼니도 해결하지 못했지만 솔잎을 씹으면서 오직 독서에만 열중했다. 아버지가 왜군에게 살해되자 병화를 무릅쓰고 시신을 찾아 장사 지낸 효자이기도 했다. 벼슬에 뜻이 없었지만 주위의 추천으로 1634년(인조 12) 영숭전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당시 그의 인품을 들은 인조반정의 공신 최명길(崔鳴吉)이 한 번 만나자 했지만 거절했다. 1636년 봄에는 나라에서 충의사를 모병하자 쉰다섯의 나이에 자원하기도 했다. 특히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나라가 위태로울 때 싸우다 죽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며 최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인조의 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 용샘과 관련된 전설도 전해진다.

11세 되던 해 임진년에 왜군 쳐들어와
솔잎으로 허기 달래며 학문에만 전념

벼슬 제의 번번이 거절하고 청빈한 삶
선산에 애정 남달라 기록도 종종 남겨

충의사 모병 소식 듣고 쉰 다섯에 자원
그 해 병자호란 일어나자 의병 일으켜



#1. 솔잎을 씹으며 오로지 학문 전념

1581년(선조14) 구미 해평면 괴곡리 고리실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재(健齋) 박수일(朴遂一), 어머니는 인의(引儀) 조인복(趙仁復)의 딸 조씨부인이었다. 아버지 박수일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용암(龍巖) 박운(朴雲)의 후손이기도 했다. 당연히 학식과 덕망이 높아 고을에서의 신망 또한 대단했고, 온 고을이 사내아이의 탄생을 한마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사내아이는 곧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박진경(朴晋慶)이었다. 박진경은 이름에 쓰인 문자의 뜻대로 매사에 조심하여 삼가고, 범사에 칭찬받을 일이 많은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1592년(선조25) 임진년(壬辰年), 박진경이 11세가 되던 해에 왜란이 일어났다. 생활은 궁핍해지고 정서 또한 피폐해졌지만 박진경은 어린 자신이 할 일이란 부지런히 학문을 쌓는 것이라 확신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박진경을 걸출한 학자 여헌(旅軒) 장현광이 내내 눈여겨보았다. 박진경이 16세가 되던 1596년(선조 29)의 일이었다. 이후로 박진경은 장현광의 문하에서 학문을 발전시켜갔다. 이는 곧 혼인으로 이어져서 박진경은 장현광의 사위가 되었다.

하지만 평시가 아닌 전시였다. 그것도 벌써 몇 년째 질질 끌고 있는 피 마르는 전쟁의 한가운데였다. 일상의 안정은 둘째로 하더라도 당장의 끼니 해결조차 어려운 날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노복이 근심어린 얼굴을 지었다.

“양식거리가 없습니다.”

“우리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니 호들갑 떨지 말게.”

“그래도 사뭇 굶고 계실 수는 없습니다.”

“기근으로 길을 떠도는 백성이 한둘이 아닌 터. 배부른 투정일세.”

그러고는 솔잎을 씹어 속을 달래며 서책에 몰두했다. 박진경에게 배곯는 일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보가 전해져 왔다. 아버지 박수일이 왜군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하물며 아버지의 시신이 참화의 현장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내용도 함께였다. 박진경이 “내 모셔올 것이다” 하고는 길 떠날 채비에 나섰다. 식솔들이 죄다 말리고 나섰다.

“위험합니다.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박진경은 단호했다.

“아버지 곁에 누울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상관없다.”

그렇게 박진경은 전장으로 향했고, 아버지가 왜군에게 당했다는 장소를 뒤지고 뒤져 마침내 시신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시신을 모셔와 장사를 지냈다. 그때 박진경의 애끓는 곡소리가 온 고을을 울렸다.

#2. 나라에 보람을 끼치고 죽으리

왜란 이후 수십 년이 흘렀다. 뒤숭숭한 시절인 데다 관로에 별다른 미련마저 없던 박진경은 고향에 머물며 학덕을 쌓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진경에 대한 소문은 여기저기로 흘렀다. 급기야 1634년(인조 12) 박진경의 나이 쉰셋이 되던 그해에는 평양에 있는 영숭전(永崇殿)의 참봉(參奉)에 제수되기도 했다. 영숭전이 어디인가. 조선의 국조인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전각이었다. 더불어 인조반정의 공신 최명길로부터 한 번 만나자는 청도 함께 전해왔다. 박진경은 둘 다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이 아니고 내가 만날 사람도 아니다. 덧없는 것을.”

하지만 그런 박진경도 나라에 직접적으로 보람을 끼칠 만한 일에 대해서는 거리끼는 법이 없었다. 1636년(인조14) 봄 나라에서 충의사(忠義士)를 모병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였다. 박진경은 지체없이 관아로 달려갔다.

“자원하고 싶습니다.”

“공의 나이 쉰하고도 다섯이오. 무리라 여기오.”

“나라를 위하는 일에 젊고 늙고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관아의 향리가 몇 번 더 말렸지만 박진경의 충심어린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에 박진경은 모집에 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해 겨울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 병자호란이었다. 살아서 두 번째로 겪는 난리에 박진경은 통탄해 마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비분강개하며 의병을 일으킨 박진경의 뜻에 인재(齋) 최현(崔晛), 김녕(金寧), 욕담(浴潭) 김공(金), 양탄(陽灘) 김양(金瀁), 탄옹(灘翁) 김경(金) 등이 함께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힘껏 싸우다 죽는 것이 신하된 참된 도리다. 하니 일어서라. 힘을 모으라.”

죽음을 각오한 웅변이었다.

“내 죽음은 보람된 죽음이 될 것이다. 여한이 없다.”

이에 박진경을 비롯한 의병들은 적암리(현재 충북 보은군 마로면 적암리)로 향했다. 도대장(都大將) 전식(全湜)이 성주·대구·예천의 군병과 더불어 북상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착해 아무리 기다려도 세 고을의 군대는 나타나지 않는 대신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전하께서 항복하셨다고 합니다.”

“무어라?”

“남한산성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하셨다 합니다.”

청천벽력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적을 향해 땅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절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해산하라는 어명입니다.”

박진경은 고통스러웠다.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서야 한다니 속이 끓었다. 하지만 임금과 조정이 결정한 일에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박진경의 얼굴에 비통한 눈물이 흘렀다. 박진경은 이를 글로 남겼다. ‘문성하지맹(聞城下之盟)’ 즉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듣고’라는 시였다. 성하지맹은 ‘성하의 맹세’라는 뜻으로 적에 의해 점령당한 후 맺는 굴욕적인 조약을 일렀다. 제목만으로도 상황과 분위기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3. 전설을 품은 선비

박진경은 이후로도 조정으로부터 꾸준히 부름을 받았다. 개성에 자리한 태조 정비 신의왕후의 제릉(齊陵)을 관리하는 참봉에 제수된 데 이어 세자시부로 천거되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박진경은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구미 금오산 아래에서 청빈하고 담박한 삶을 꾸려갔다.

특히 구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박진경은 선산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선산에 대한 기록을 종종 남겼다. 낙동강변의 월파정(月波亭)을 수리할 때 수령의 업적을 사실적으로 적은 ‘월파정중수기문(月波亭重修記文)’과 금오산의 절경과 사적을 꼼꼼하게 정리한 ‘금오록(金烏錄)’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박진경은 전설을 품은 인물이었다. 전설은 구미 산동면 성수리에 있는 용샘에서 그 이야기가 출발한다. 이 용샘은 이름 그대로 구룡(九龍)의 혼이 서린 곳으로 예로부터 신비한 능력이 서려 있었다. 가뭄이 아무리 극심한 철에도 결코 물이 마르는 법이 없었고, 물의 빛깔과 양 등으로 그해 농사가 풍작이 될지 흉작이 될지를 예측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용마(龍馬)의 존재였다. 용마 한 마리가 늘 용샘의 주위를 노닐며 지킨 것이다. 그런데 이 용마는 사람이 접근하기만 하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말아서 그 누구도 용마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박진경이 그 용마를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용마가 전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여긴 박진경은 그 용마를 데리고 낙동강 갈대밭을 누비며 조련시켰다. 이로써 용마는 곧 천하에 둘도 없는 명마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진경은 해평면의 냉산(冷山)에서 용샘을 향해 활을 쏘아 보내곤 용마가 먼저 도착하는지를 시험했다. 하지만 용마를 타고 용샘에 당도하고 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도 화살은 오지 않고 그렇다고 화살이 떨어진 흔적도 없었다. 박진경은 용마가 화살보다 늦은 것으로 알고 노여워했다. 그리고 조련을 실패한 것에 자책하며 용마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그 순간 화살이 날아와 바위에 꽂혔다. 용마가 빨라도 너무 빨랐던 것이다. 그제서야 박진경은 자신을 탓하며 애석해 했다고 한다.

전설 속에 등장할 만큼 인재로 손꼽혔던 박진경은 구미 고아읍 원호리의 남강서원(南岡書院)에서 배향하고 있다. 저서로는 ‘와유당문집(臥遊堂文集)’ ‘해동명현록(海東名賢錄)’ ‘상례휘보(喪禮彙補)’ 등이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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