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9] 상주 북천전투의 충신 김종무의 아들 김공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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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3   |  발행일 2018-09-13 제13면   |  수정 2018-09-18
“잡혀가느니 차라리” 자신의 목을 칼로 찌른 의기에 왜군마저 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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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이 은거한 금오산 도선굴 근처 세류폭포 절벽에는 ‘浴潭金先生詠歸臺(욕담 김선생 영귀대)’라는 큼직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욕담은 김공의 호로, 그의 후손들이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상주 북천전투에서 전사한 충신 김종무(영남일보 9월6일자 14면 보도)에게는 김충과 김공 두 아들이 있었다. 특히 막내 김공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성품이 강직했다. 그는 12세 되던 해 아버지 김종무가 상주 북천전투에 참전하자 형과 함께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금오산 도선굴에 피란했다. 하지만 도선굴도 안전하지는 못했다. 곧장 왜적이 들이닥쳐 창으로 위협하며 김공을 데려가려 했다. 이 때 김공은 “적의 손에 잡혀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스스로 자신의 목을 칼로 찔러 왜적을 당황케 했다. 이후 왜적은 어린 김공의 모습에 ‘참으로 의롭다’며 돌아갔다고 한다. 김공의 강직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로,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비극은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 김종무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형마저 차례로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김공은 외가인 안동에서 외삼촌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의 보살핌을 받다가, 스무살 되던 해에 고향 구미로 돌아와 금오산 도선굴 아래 초막을 짓고 학문을 닦았다.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주위 사람들이 수차례 관직에 천거했지만 아버지의 시신도 거두지 못한 죄인이 벼슬을 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또한 죽을 때까지 이를 원통해 하며 얇은 옷과 소박한 반찬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는 최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인조의 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비분한 나머지 스스로 광인이라 칭하였다.

#1. 한꺼번에 닥친 비극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 이후로 내내 긴장감에 차있던 집안 분위기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김공(金)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조곤조곤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형님과 제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뵙기라도 했으면 이리 서럽지는 않을 것을.”

류씨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함양의 사근찰방(沙斤察訪)으로 가있던 지아비 김종무(金宗武)가 역마를 이끌고 상주로 떠난다기에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십중팔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터이니 만에 하나 잠시라도 얼굴을 비출 줄 알았던 것이다. 하물며 집이 있는 선산은 상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들를 수 있는 거리였다.


열두살 나이에 임진왜란 닥쳐
가족과 함께 피란길 나섰으나
아버지 김종무 전사 소식 듣고
할머니·형, 충격에 유명 달리해
안동 피신 후 어머니마저 운명
“나는 죄인” 금오산 도선굴 은거
병자호란땐 최현과 의병 일으켜



하지만 김종무는 그대로 지나쳐갔다. 큰일을 앞두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지아비의 뜻을 모르지는 않지만, 지아비가 향하는 곳이 다른 곳도 아닌 전쟁터였다. 과연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를 떠올리다 보면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김공도 다르지 않았다. 고작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르는 순간에 담담하기란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김공은 애써 정신을 추슬렀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살펴야 했다. 김공이 형 김충(金)에게 시선을 돌리자 김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라는 뜻이었다.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어머니. 적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서둘러야 합니다.”

류씨 부인이 눈물을 거두고 일어섰다. 그러곤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섰다. 이어서 김공이 앞장서 길을 잡았다. 몸이 좋지 않은 형 김충을 배려한 바였다. 그렇게 김종무의 일가족은 금오산(金烏山)의 도선굴(道詵窟)로 피란했다. 그런데 도선굴에 도착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참전한 상주 북천전투의 정황이 전해져왔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대군에 밀려 조선관군이 패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더 엄청난 소식은 그 다음이었다.

“김종무공도 돌아가셨다 합니다.”

할머니가 정신을 놓으며 쓰러졌다. 그러고 그대로 세상을 떴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건강이 위태롭던 형 김충이 끝내 할머니를 따라간 것이다.

김공도 김공이지만 류씨 부인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아비에 이어 시어머니에, 거기다 고작 열여섯 살밖에 안 된 큰아들까지 한꺼번에 잃었으니 가슴이 남아나질 않은 것이다. 집도 아닌 피란처의 험한 굴속에서 류씨 부인은 앓아누웠다. 김공에게는 마음 놓고 슬퍼할 짧은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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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이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피해 가족과 함께 피신한 금오산 도선굴. 전쟁 중 고아가 된 김공은 안동 외가에서 지내다 스무살 되던 해 다시 도선굴에 은거하며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열중했다.

#2. 의로운 소년에서 의로운 청년으로

문제는 도선굴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김공이 밖에 나가 있다가 그만 왜적의 눈에 띄고야 말았다.

“옥설(玉雪)이 따로 없으니 실로 탐나는도다. 끌고 가자.”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눈치를 챈 김공이 품에서 작은 칼을 빼어들었다.

“적의 손에 잡혀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

그러고는 주저 없이 목을 찔렀다. 피가 흘러 몸과 옷을 적시는 것을 보고 왜적이 당황했다.

“어린 소년 아닌가. 한데 저리 의롭다니 놀랍다. 그만 두고 가자.”

김공은 어머니 곁에 남을 수 있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상처를 치료한 후 굴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머니 류씨 부인은 좀처럼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이 소식을 전해들은 큰외삼촌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이 하인들을 동원해 안동의 집으로 데려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 김공이 통곡하며 아버지 김종무의 옷과 함께 합장했다.

이후로 김공은 큰외삼촌 류운룡과 작은외삼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보살핌 속에서 안동에서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두 사람 모두 걸출한 학자였기에 김공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할 수 있었다. 이에 김공의 학문이 날로 성숙해져갔다.

그렇게 김공의 나이 약관(弱冠) 스무 살이 되었고, 김공은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갈 차비를 했다. 그때 외할머니인 김씨 부인이 김공을 불러 앉혔다.

“어려서 부모 잃고 상심이 컸을 터인데 이리 잘 자라주니 고맙구나. 내 네게 재산을 나누어 물려줄 것이다. 큰일 하며 몸 성히 잘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전답과 노비를 분재(分財)해 주었다. 분재기(分財記)를 따로 작성했을 정도로 작은 규모가 아니었지만 김공은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시신도 찾지 못한 죄인이다. 그런 내가 어찌 편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김공은 결국 받은 재산을 안동 천전에 살고 있던 매부 김철(金澈)에게 건네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향이라고 해서 반겨줄 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머물 거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김공은 금오산 도선굴로 찾아들었다. 그러곤 굴 아래에 초막을 짓고 눌러 앉았다. 도선굴이 어디인가. 아버지의 순사(殉死) 소식을 듣고, 할머니와 형이 죽고, 어머니가 몸져눕고, 자신은 적에게 끌려갈 뻔했던 장소 아닌가. 극기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3. 나는 죽어서도 죄인이다

김공은 금오산 초막에서 학문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 걸출한 문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정진, 또 정진하였다. 김공의 학덕에 반한 장현광의 문도들이 시시때때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모여선 폭포 아래서 목욕재계한 후 시회(詩會)를 열곤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모임장소에 별명이 생겼다. 바로 ‘몸을 씻을 浴(욕)’에 ‘못 潭(담)’, 즉 ‘浴潭(욕담)’이었다. 김공은 이를 대혜폭포(大惠瀑布) 암벽에 예서체로 새기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 암각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를 일러 ‘남통동 욕담 김선생 영귀대 암각(南通洞浴潭金先生詠歸臺岩刻)’이라 이른다. 아울러 초막 근처의 세류폭포(細流瀑布) 절벽에는 ‘욕담 김선생 영귀대’라는 큼직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장현광의 것으로 김공의 후손이 새겼을 거라 여겨지고 있다.

김공이 세상과 무관한 삶을 이어가기는 했어도, 워낙 학덕이 높다보니 여러 차례 벼슬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공은 번번이 마다했다.

“나는 죄인이다. 무엇보다 내가 벼슬을 하겠다고 한양으로 가려면 상주를 지나야 하거늘, 내 그 땅을 어찌 밟고 지나가리.”

상주 북천전투에서 비참하게 운명한 아버지에 대해 한이 깊은 김공이었다. 심지어 시신도 거두지 못한 터였다. 김공은 그저 통분함을 품고 얇은 옷과 소박한 찬으로 하루하루 삶을 영위해갈 뿐이었다.

그러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은거하다시피 하던 김공이었지만,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지경에서만큼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왜란 때 그 누구보다도 큰 고통을 겪었던 김공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김공은 인재(齋) 최현(崔晛)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인조가 항복하면서 뜻을 거두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분하고 분하다. 견딜 수가 없구나. 나는 이제 광인(狂人),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김공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임종의 자리에서 네 아들을 불러 일렀다.

“아비는 죄인이다. 이는 내가 죽는다 해서 달라질 일이 아니다. 하니 장례를 널리 알리지 말 것이며 모든 절차 또한 간소히 하라.”

그렇게 다짐을 받고서야 눈을 감았다. 1581년(선조 14)에 세상에 나와 1641년(인조 19)에 세상을 떴으니,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김공의 뜻은 구미 고아읍 원호리에 자리한 남강서원(南崗書院)에서 기리고 있다. 남강서원은 1866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남강서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유지되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1877년부터는 격년으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김공을 비롯해 그의 아버지 김종무, 양탄 김양, 와류당 박진경을 배향하고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감성해의 논문 임란초기 상주전투 와 김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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