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8] 임진왜란 상주 북천전투의 충신 김종무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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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06   |  발행일 2018-09-06 제14면   |  수정 2018-09-18
임진년 왜군 1진에 끝까지 맞선 충신, 시신조차 수습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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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평성들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김종무충신정려비각. 임진왜란때 전사한 김종무는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지만 나라에서 예를 갖춰 충신으로 정표하고 정려비를 세워 그 뜻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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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무충신정려비각 안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김종무의 출생부터 상주 북천전투에서 전사한 이력, 1675년 충신으로 정표하고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된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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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무충신정려비. 비석 앞면에 새겨진 ‘충신김종무지려(忠臣金宗武之閭)’라는 글자가 자못 비장해 보인다.

구미 고아읍 원호리에서 태어난 김종무는 학식과 성품이 뛰어난 인재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김취문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청백리로 존경을 받았다. 김종무는 관직에는 뜻이 없는 고고한 선비였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주위 사람들의 천거로 전라도 남원의 오수찰방을 지냈다. 이후 경상도 함양의 사근찰방으로 근무할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주저없이 전장에 나섰다. 특히 그는 상주 북천(北川)전투에서 순변사 이일의 휘하에 들어가 상주판관 권길과 함께 힘을 다해 의병을 모았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7천여명의 왜군 1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순변사 이일은 군사들을 두고 도망쳐 패전하고 말았다. 하지만 김종무는 상주판관 권길과 끝까지 선두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고귀한 죽음에 나라에서도 예를 갖춰 충신으로 정표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신정려비를 세웠다.

당대 뛰어난 학자 대사간 김취문의 아들
과거 멀리했지만 주변 천거로 관직 올라
경상우도 함양 사근찰방 근무때 왜란 발발
순변사 이일 달아난 상주서 끝까지 분전
마흔넷 나이에 왜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
사후 90년 고향 구미에 충신정려비 세워

#1. 관직에는 뜻이 없는 고고한 선비

‘평성’(坪城, 일명 ‘들성’, 지금의 구미 고아읍 원호리)에서 아무나 붙들고 ‘이 고을에서 가장 이름이 높은 이가 누구요’하고 물으면 하나같이 가리키는 인재가 있었다. 김취문(金就文, 1509~1570)이었다.

김취문은 1537년(중종 32)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로를 열었다. 이후 여러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다가 선조 조에는 대사간에 이르렀을 정도로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다. 무엇보다도 김취문에게는 사리사욕이 없었다. 이는 밖으로도 드러나서 늘 검박한 생활을 이어갔고, 이를 통해 명종 때는 청백리로 꼽히기도 했다.

그런 김취문에게는 그를 꼭 닮은 아들이 있었다. 김종무(金宗武)였다. 1548년(명종 3) 평성에서 태어난 김종무는 학식이나 성품 면에서 흠 잡을 곳이 없는 인재였다. 다만 아버지와 한 가지 달랐던 점은 과거에 뜻이 없었다. 하지만 김종무는 빛이었다. 스스로 밝은 것을 떠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종무는 1591년(선조 24)에 학덕(學德)으로 여러 사람의 천거를 받아 전라도 남원의 오수찰방(獒樹察訪)으로 부임했다. 찰방은 각 도에 위치한 역참의 운영을 맡은 종6품의 외관직으로 역민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 여러 임무를 총괄했다. 나아가 목민관이 어떤 방식으로 고을을 꾸려 가는지를 비롯해 백성의 질병 상태까지도 파악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러한 연유로 나라에서는 아무에게나 찰방을 맡기지 않았다. 하지만 도량이 넓은 김종무에게는 맞춤인 직이었다.

오수찰방의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한 김종무는 경상우도 함양의 사근찰방(沙斤察訪)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당시 경상우도에는 함양 사근도(沙斤道)를 비롯해 창원 자여도(自如道), 진주 소촌도(召村道), 금산 김천도(金泉道), 문경 유곡도(幽谷道) 등 다섯 곳의 찰방역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사근도는 운봉을 거쳐 남원으로 이어지는 전라도와의 교통요지로, 관하에 14개 속역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사근도에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2. 포기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다.’

김종무는 한탄했다.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4월13일에 왜군이 가덕도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경상도 각 지역의 관군들은 신속하게 진지로 이동해 적에 대응했다. 하지만 왜군은 조총 등의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데다 사기마저 하늘을 찔렀다. 진격 속도마저 무섭도록 빠른 왜군 앞에서 관군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나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김종무는 서둘러 역마를 준비했다.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중앙군과 함께라면 그대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정에서 왜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것은 임란 발생 사흘째인 4월17일이었다. 이날 조정에서는 경상도를 방어할 중앙군 사령관으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군대 전체를 총괄할 최고사령관으로는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을 임명해 전쟁에 나서도록 했다.

순변사 이일은 바로 병력 차출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20일에도 동원된 인원은 정예장교 60여명이 전부였다. 예상 병력 300명의 고작 5분의1 수준이었다. 하지만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도성을 출발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상도 11개 역의 찰방들에게 역마 동원령을 하달했다. 군사와 군수품을 원활히 수송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바로 이 명령에 따라 김종무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역마가 다 준비되자마자 김종무는 노복 하나만 데리고 길을 떠났다. 상주를 향해 달리는 길에 고향 선산이 지척에 있었지만 들르지 않았다. 사적인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상주에서 이일과 조우했다.

다행이라 여겼던 것도 잠시, 김종무는 기가 막혔다. 역마를 끌고 나타난 이가 자신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상주 상황은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 도망가고 텅 비다시피한 읍내에 판관(判官) 권길(權吉)만이 남아 행정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로한 이일을 보면서 김종무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도망간 백성을 모아 그들의 손에 무기를 들려야 합니다.”

지당했다. 대구가 이미 점령당했다는 첩보가 전해진 터에 역마마저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상주에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싸울 사람이 있어야 했다. 이에 김종무를 비롯한 이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백성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모은 인원이 800~900명이었다.

#3. 아! 통한의 북천

4월24일, 이일의 중앙군과 김종무·권길이 포함된 상주관군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상주관군이 “1천도 안 되는 소수 병력으로 2만에 가까운 왜군의 대군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읍성 사수가 먼저입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순변사 이일의 중앙군 쪽은 반대였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넓은 평야에서 기마전으로 전면전으로 나서야 한다.”

함경도에서 여진족과의 숱한 전투를 통해 명성을 쌓아온 명장 이일에게는 그 방식이 익숙했던 것이다.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지만 상주관군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상주 북천으로 이동해 진영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북천 냇가에서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대장기 아래에 서있는 이일을 중심으로 김종무와 권길이 나란히 서서 훈련을 지휘했다.

바로 그 시간, 일본 척후병들은 이미 상주의 남쪽 장천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4월25일 동트기 전의 새벽에 북천마저 건넜다. 일전만이 남은 상황에서 김종무가 군사들을 독려했다.

“겁먹지 마라. 할 수 있다.”

마침내 왜군의 포위가 시작되었고 곧이어 조총부대의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왜군이 총을 발사할 적마다 천둥이 진동하고 우박이 날리는 듯했다. 조선의 기병들이 말을 탈 틈조차 없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궁수들이 서둘러 활로 응사했지만 화살은 왜군의 대열에 미치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렸다. 이러한 가운데 패전을 예감한 순변사 이일이 말머리를 돌려 급히 북쪽으로 달아났고, 군사들 또한 이리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김종무는 판관 권길과 선두에서 나서 적과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김종무는 참담했다. 처음부터 성 안에 진을 쳤더라면 이런 식으로 하무하게 섬멸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분이 끓었다. 하지만 더는 방법이 없었다. 김종무가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의관을 바로 하고 자신이 쥐고 있던 부채를 노복에게 건넸다.

“나는 이제 여기서 죽는다. 하니 너는 이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에게 알리라.”

노복이 눈물을 터뜨리며 부채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차마 김종무만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어 그대로 서있었다. 김종무는 곧장 다시 말에 올랐다. 외로운 돌격이었다. 하지만 왜군의 총탄에 노복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김종무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일본군 선발부대인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군과 치른 조선군 최초의 전면전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4. 길이길이 이어지는 충렬의 의미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고귀한 죽음에 나라에서는 예를 갖췄다. 김종무의 사후 90년 뒤인 1675년(숙종 1)에 충신으로 정표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신정려비(忠臣旌閭碑)가 세워졌다. 고향인 구미와 전사한 장소인 상주에서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구미의 남강서원(南崗書院)과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서 김종무를 제향했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기도 했다. 김종무충신정려비는 지금의 구미 고아읍 원호리 평성들 앞 도로변이 세워져 있다. 비석 앞면에 쓰인 ‘충신김종무지려(忠臣金宗武之閭)’라는 글자가 자못 비장하다. 이후 정려비는 1896년(고종 33)에 중건됐다. 비의 오른쪽 면에 각자된 ‘숭정후오병신오월오일중건(崇禎後五丙申五月五日重建)’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경북도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감성해의 논문 임란초기 상주전투와 김종무. 김성우의 논문 임진왜란 초기 제승방략전법의 작동 방식과 상주 북천전투.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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