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4] 독립운동가 목산 조현욱

  • 박관영
  • |
  • 입력 2018-09-05   |  발행일 2018-09-05 제12면   |  수정 2018-09-05
총칼든 왜경이 시위군중 위협하자 “내가 주동자다” 당당히 맞서
20180905
조현욱이 주도해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화목장터.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던 화목장터는 아스팔트 도로와 일반 주택이 들어서면서 조용한 거리로 변했다. 몇몇 상회와 철물가게, 다방 등이 옛 장터를 기억하게 할 뿐이다.
20180905
대구 노곡동에 있는 조현욱 묘소. 봉분을 둘레석으로 감싸고 수수한 석등을 세운 모습이 소박하다.
20180905
청송 현서면 덕계리 현서중학교 앞에 자리한 ‘목산조현욱선생순국기념비’.
20180905
대구 노곡동 조현욱 묘소 아래에도 1970년 3월26일에 세운 ‘목산 조현욱 의사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 청송에 터를 잡은 조현욱

조현욱은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15세손이면서,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던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의 10세손이다. 사도세자의 변고 당시 홀로 죽음을 무릅쓰고 감영에 나아가 통곡했던 승와(升窩) 조춘경(趙春慶)의 5세손이기도 하다. 조현욱은 1860년 1월2일 대구 원대동의 함안조씨(咸安趙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인오(仁吾), 호는 목산이다.

아버지는 조교화(趙敎和),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어릴 때 백부 조명화(趙命和)에게 입양돼 백모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손에 자랐다. 조현욱은 두 집 부모 모두에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모친이 병이 나자 날아가던 매가 꿩을 떨어뜨렸고, 또 어느 날에는 아무리 구해도 없던 오계가 저절로 걸어 들어왔다고 해 인근에서는 ‘하늘이 아는 효성’이라 했다. 이 외에는 그의 성장기에 대해 그다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선대인 조춘경의 묘소를 자주 오르내리고, 고기잡이로 여생을 보낸 먼 할아버지 조려를 사모해 함안을 자주 오갔다고 전한다.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조현욱은 대대로 부려오던 집안의 세전노비들에게 논밭을 나누어주고 모두 해방시켰다. 그 뒤 대구 원대동을 떠나 선대의 고향인 청송으로 돌아가 보현산 깊은 골짜기인 현서면 수락동(지금의 현서면 수락리)에 터를 잡았다. 이후 나무하고 소 먹이며 살면서 스스로 목산이라 자호했다. 젊은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고 농사짓는 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산을 가꾸고 과실나무를 심어 다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으려 애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하의 식민통치가 시작됐다.

갑오개혁 때 집안 노비에 논밭 주고 해방
1919년 전국서 독립 만세운동 일어나자
신태휴·조병국에 격문 보내 동참 권유
화목장터서 마을주민과 국권회복 힘 써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2년간 옥살이


#2. 화목장터 독립만세운동

1919년 전국 각지에서는 독립을 위한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조현욱은 이때야말로 조선이 독립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청송 현서면 무계리(武溪里)의 신태휴(申泰烋)와 복리(福里)의 조병국(趙炳國)에게 격문을 보내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그해 3월26일 아침, 조현욱, 신태휴, 조병국은 그들과 뜻을 함께한 마을 주민 50여 명과 함께 ‘화목(和睦)장터’로 향했다.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그들의 걸음마다 인근 주민들이 합세했다. 오후 1시경 장터에 결집한 시위군중은 수백 명으로 늘어났고 만세 소리와 독립을 부르짖는 깃발은 노도와 같았다. 이러한 가운데 화목주재소에서 총검을 든 왜경 3명이 출동해 군중을 위협하자 조현욱은 왜경에게 당당하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주동자는 바로 나’라고 외치며 서릿발 같은 기품을 보였다. 결국 이날 군중은 강제 해산됐다. 조현욱과 신태휴 등 주동 인물 2명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붙잡히지 않았던 조병국은 다음날인 27일 동민 1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다시 화목장터로 향했다. 장터로 가는 도중 사람들이 늘어나 시위대는 6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청송경찰서의 조선인 경부와 3명의 경찰이 출동해 시위대의 진로를 막고 해산을 명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그들의 뜻을 꺾지 않았다. 특히 군중들은 조선인 경부에게 ‘너희들은 조선인이 아니냐! 국권 회복의 거사를 저지하려는 것은 괘씸한 일이다. 먼저 저놈들을 잡아 죽이자!’고 외치면서 달려들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경은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야만적인 발포로 4명이 부상을 당하고 조병국은 결국 체포됐다. 군중은 해산해야만 했다. 그날로부터 근 백년이 지난 오늘, 만세소리 울려 퍼졌던 화목장터는 아스팔트 도로와 일반 주택이 들어서 있는 조용한 거리로 변했다. 다만 몇몇 상회와 철물가게, 다방 등이 옛 장터를 기억하게 한다. 현재 화목 오일장은 그곳으로부터 몇 발자국 아래 남쪽 거리에 펼쳐져 있다. 조현욱, 신태휴, 조병국 등은 징역 2년(청송군지와 순절비에는 징역 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죄명은 보안법위반이었다. 조현욱은 옥중에서 시를 썼다.

‘五百由來尙義人/ 一朝胡爲犬羊民/ 天日無光如此地/ 寧爲蹈海不爲臣’.

‘오백년을 이어 의를 숭상한 이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백성이 되겠는가/ 하늘의 해가 빛을 잃은 것이 이 땅과 같으니/ 바다를 밟아 평온할지언정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헤아려진다. 도해(蹈海)란 죽음을 뜻하는 것. 결의는 이미 서 있었다.

#3. 시체는 부연에서 찾으라

두 해의 옥고를 겪은 후 조현욱은 1922년 2월19일 이른 새벽 청송 수락리 가마소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그는 거처의 벽에 다음과 같은 유시(遺詩)를 남겼다.

‘寧爲蹈海不爲臣之句/ 今將副矣覓屍於釜淵’.

옥중의 시는 완결된 것이 아니었다. ‘바다를 밟아 평온할지언정 신하는 되지 않겠다’던 문구는 ‘시체는 부연(釜淵)에서 찾으라’는 것으로 비로소 끝맺음 되었다.

그의 묘소는 대구에 마련됐다.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원대동과 마주보고 있는 노곡동(魯谷洞)이다. 봉분을 둘레석으로 감싸고 수수한 석등을 세워 밝힌 모습이다. 그의 묘소 아래에는 1970년 3월26일에 세운 ‘목산 조현욱 의사 순국기념비’가 있다. 청송 현서면 덕계리 현서중학교 앞에도 1983년 4월5일에 세운 순국 기념비가 있다.

특히 광복되던 해인 1945년 청송 주민들은 성금을 모아 그가 몸을 던진 보현천 가마소 앞에 순절비를 세웠다. 비석은 도로공사로 인해 훼손되어 1991년 6월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여 다시 세웠다. 이후 성덕댐 준공과 함께 담수로 인해 2014년 청송군과 한국수자원공사의 도움으로 성덕댐 체육공원으로 이건했다. 가마소는 수위가 높아지면 물에 잠겨 볼 수가 없다. 지나는 이 없는 마을 안길의 끝, 잡풀에 뒤덮여 그 모습 찾기 어렵지만, 그곳은 보현천 맑은 물이 깊은 소를 이루는 곳, 보현천 맑은 물이 흰 바위를 씻어 맑게 빛나는 곳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청송의병사이버박물관 자료. 국가보훈처 자료. 청송군지. 김희곤 외, 청송의 독립운동사, 2004. 조현욱순절비문·순국기념비문·묘비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